27화. 아직 안 죽은 순서
# 27화. 아직 안 죽은 순서
모서리 사이의 공기는 조금 전과 달랐다.
여전히 좁고, 여전히 불안정했고, 여전히 누가 먼저 잘못 건드리면 조각도 길도 같이 죽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제 셋은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었다. 더 큰 조각을 먼저 손에 넣은 저 손도, 이걸 혼자 끝까지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온은 조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서 더 끌면 다 같이 죽어. 조각도, 길도, 지금 남은 반응도.”
남자는 더 큰 조각을 든 손에 힘을 조금만 남긴 채 답했다.
“그래서 안 뛰었지.”
세른이 벽면과 조각 가장자리를 번갈아 보며 낮게 말했다.
“다음 판별부는 마지막 한 번쯤은 반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순서를 틀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아테르가 그 말을 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회수보다 개방입니다.”
남자는 그 문장을 듣고 처음으로 아테르를 조금 길게 봤다.
“제국 쪽 말치곤 드물게 맞는 소리네.”
아테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당신 쪽도 바닥 인부보단 덜 시끄럽군요.”
근거리 채널 너머로 서린이 낮게 끼어들었다.
“둘 다 살아 있을 때만 계속해.”
그 짧은 한마디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시온이 물었다.
“이름.”
남자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망설임이라기보다, 지금 꺼내는 이름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별 의미 없다는 사람의 습관처럼 느껴졌다.
“카엘.”
시온은 그 이름을 속으로 한 번 굴렸다.
짧고, 가볍고, 너무 쉽게 잘릴 수도 있는 이름.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기록 바깥에 오래 있던 사람이 고를 법한 이름 같기도 했다. 진짜 이름보다 먼저, 지금 부를 수 있는 이름부터 남겨두는 사람.
채널 너머로 서린이 아주 짧게 침묵했다.
그 침묵은 평소의 판단형 멈춤과는 결이 달랐다.
"…카엘?"
시온이 바로 알아챘다.
"왜."
"아니."
서린의 목소리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성이랑 같아서."
시온이 피식 웃었다.
"묘족에서 카엘이 뭐 특별한 성이야. 밖에 나가면 셋 중 하나는 카엘이잖아."
"그건 맞지."
서린은 그 이상 끌지 않았다.
다만 잠깐, 저 이름이 가명이라는 걸 먼저 확인한 사람처럼 짧게 한 번 더 생각하는 기색이 있었다.
세른이 낮게 말했다.
“좋습니다. 카엘. 그러면 어디까지 읽었는지부터 맞춰보죠.”
카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시험하겠다는 소리야?”
“아니.”
세른이 차갑게 답했다.
“서로 틀린 순서를 밟지 않겠다는 소리입니다.”
그건 기분이 아니라 실제 생존의 문제였다. 카엘도 그건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더 따지지 않았다.
아테르가 아주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구조를 읽는 사람 특유의 거리감은 유지한 채, 더 큰 조각의 문양과 손상선을 보기 위한 최소한의 접근이었다.
“당신이 먼저 읽은 건 맞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그러면 어디에서 끊겼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카엘은 조각 중앙보다 약간 아래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겉문양은 살아 있는데, 안쪽 승인선이 중간에서 죽어.”
아테르 눈빛이 즉시 달라졌다.
“죽은 게 아닙니다. 잘린 겁니다.”
짧은 정적.
카엘이 그를 봤다.
“차이가 있나?”
“큽니다.”
아테르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죽은 기록은 복구를 고민해야 하지만, 잘린 기록은 이어붙이는 방식부터 바뀝니다.”
시온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마디로.”
이번엔 세른이 정리했다.
“이 조각 하나만으론 안 열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말로 확인되자 무게가 달라졌다.
시온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안 도망쳤네.”
카엘은 এবার 부정하지 않았다.
“도망은 칠 수 있지.”
그가 천천히 답했다.
“근데 그러면 이건 그냥 비싼 고철이 돼.”
근거리 채널 너머로 한지우 목소리가 짧게 들어왔다.
“구조물 반응 다시 떨어진다. 오래 못 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안쪽으로 잠깐 쏠렸다.
시온이 바로 결론을 냈다.
“좋아. 그럼 역할부터 자르자.”
카엘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시온을 봤다.
시온이 먼저 말했다.
“나는 잔광하고 흔적 잇는다.”
아테르가 바로 이었다.
“나는 판별선과 승인 구조를 봅니다.”
세른도 낮게 덧붙였다.
“저는 순서와 간격을 잡겠습니다.”
짧은 침묵 끝에, 카엘이 말했다.
“좋아.”
그는 더 큰 조각을 약간 고쳐 쥐었다.
“이건 내가 든다. 무게 때문이기도 하고, 반응이 틀어질 때 제일 먼저 잘려야 하는 쪽도 이걸 쥔 쪽이니까.”
시온이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 하네.”
카엘은 그 말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먼저 들어가면,”
그가 낮게 말했다.
“너는 내가 놓친 잔광을 이어. 구조는 뒤에서 붙이고, 순서는 그다음에 자른다.”
세른이 조용히 물었다.
“그리고 잘못되면?”
근거리 채널 너머로 서린이 먼저 잘랐다.
“내가 끊어.”
시온이 대꾸하려다 말았다.
서린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너희가 더 버티면 같이 죽는다고 판단되면, 내가 끊는다. 그건 미리 말해둔다.”
이번엔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카엘도 그 말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을 뿐이었다. 저 말이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아테르가 낮게 말했다.
“가능성은 한 번입니다.”
세른이 바로 이었다.
“그리고 그 한 번은 지금입니다.”
카엘은 허리 쪽에 붙은 짧은 금속 손잡이를 스치듯 건드렸다. 검이라고 부르기엔 과장되지 않았고, 공구라고 부르기엔 너무 손에 익은 형태였다. 길을 열 때도 쓰고, 막아야 할 때도 쓰고, 결국은 살아남기 위해 몸에 붙여온 종류의 금속이었다.
시온이 그걸 보고 낮게 물었다.
“그건 길 여는 데도 쓰냐.”
카엘은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답했다.
“길만 여는 데 쓰진 않아.”
짧은 답이었지만 충분했다.
그 말 안에는 저 금속이 공격이든 방어든, 혹은 둘 사이 어딘가든 간에 이미 오래 몸의 일부처럼 굴러왔다는 감각이 들어 있었다.
근거리 채널 너머로 한지우가 짧게 말했다.
“반응, 더 내려간다.”
시온이 숨을 한 번 골랐다.
“간다.”
그 한마디 뒤로 모든 움직임이 동시에 정리됐다.
카엘이 더 큰 조각을 아테르가 볼 수 있는 각도로 아주 조금 돌렸고, 아테르는 손을 뻗기 직전의 거리에서 문양선과 잘린 승인부를 읽기 시작했다. 세른은 발을 디딜 간격과 반응이 흔들리는 속도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렸고, 시온은 구조물 안쪽 잔광이 아직 이어지는 가장 얇은 결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채널 너머의 서린과 한지우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여섯이 전부 같은 실패를 보고 있었다.
잘못 열면 끝난다.
하지만 지금 안 열어도 끝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죽기 직전까지 갔던 판별부가 아주 희미하게 다시 한 번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