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출발선
# 13화. 출발선
엘리아는 판독판을 닫은 뒤에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 위엔 조각이 여전히 놓여 있었고, 방 안 공기도 아직 그 조각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 오래 이 방 안에 머문다고 사건이 쉬워지진 않는다. 좌표가 생긴 순간부터, 도피는 더 이상 제자리 숨기가 아니라 어디로 움직이느냐의 문제가 됐다.
서린이 먼저 침묵을 깼다.
“좋아. 그럼 방법부터 보자.”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좋네.
역시 너는 감상보다 이동이 먼저구나.”
“감상해 봤자 연료 안 생기잖아.”
서린은 바로 항로 패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오늘 밤 안에 안 빠지면, 여기 좌표를 읽은 대가가 바로 붙어. 안쪽 보관구역에 있던 사람 둘, 바깥 접속 하나, 다 같이 팔릴 수 있어.”
문가에 기대 있던 요나가 바로 받았다.
“그건 맞는 말이지.”
시온은 피식 웃었지만, 눈은 금방 다시 진지해졌다.
외곽 성단 쪽 폐쇄 환승점. 좌표 하나 생겼다고 길이 바로 열린 건 아니었다. 그런 곳은 보통 공식 기록에선 죽어 있고, 실제론 반쯤 밀수선이나 폐쇄 물류망이 물고 사는 경우가 많다. 가는 길도 귀찮고, 들키면 더 귀찮다.
아테르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 출발할 수 있습니까.”
요나는 대답 대신 엘리아를 먼저 봤다.
이 방 안에서 좌표를 읽은 사람은 그녀였고, 그 좌표가 어느 정도 위험한지 값 붙일 사람도 결국 그녀였다.
엘리아는 과자 봉지를 한 번 접어 옆으로 밀어두었다.
“지금 당장 뛰면 죽고, 하루 이틀 묵으면 더 비싸져.”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 안쪽으로 빠지는 게 제일 낫지.”
서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범위네.”
세른은 낮게 물었다.
“직선 항로가 있습니까.”
엘리아가 웃었다.
“있으면 누가 그걸 폐쇄 환승점이라 부르겠어.”
짧은 정적.
아테르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제국 승인원에선 길이 닫혔다고 하면 보통 권한이 사라진 걸 뜻하지만, 이쪽에선 길이 닫혔다고 해도 아는 사람끼리는 여전히 드나드는 길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차이가 자꾸 신경에 걸렸다.
엘리아는 책상 아래에서 낡은 항로 패드를 꺼내 펼쳤다.
화면에 뜬 건 정식 항로가 아니라, 이미 기록 바깥으로 밀려난 우회선과 죽은 환승점들, 쓰이지 않는 이름으로만 남은 도크 표식들이었다.
“공식선은 안 돼.”
그녀가 선 하나를 손톱으로 밀어 지웠다.
“지금 너희 이름은 이미 안쪽 몇 군데에 찍혔고, 그 조각은 더 오래 들고 다닐수록 위험해.”
시온이 물었다.
“그럼 요나 배로 바로 가?”
“중간 한 번 바꿔야 해.”
요나가 대신 답했다.
“내 배로 외곽 접속까지는 뺄 수 있는데, 거기서 성단 깊숙한 쪽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선이 필요해.”
서린이 인상을 썼다.
“벌써부터 갈아타네.”
“좋은 일은 아니지.”
엘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근데 죽은 길 쪽으로 갈 땐 원래 배가 한 척으로 안 끝나.”
세른은 항로 패드를 보며 이미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출발 가능 시간, 추적선 재정렬 주기, 제국 봉쇄선이 바깥쪽까지 퍼지는 속도, 항구 브로커들이 좌표를 더럽히는 타이밍. 그리고 각하가 여기서 더 멀어질수록 되돌릴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줄어드는지도.
아테르는 그 계산을 굳이 묻지 않아도 대략 읽을 수 있었다.
발카르 가문 후계자가 제국 승인원 기록 바깥의 폐쇄 환승점을 향해 도망치듯 움직인다. 이미 정상적인 복귀선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엘리아가 그쪽을 한번 힐끗 보더니 물었다.
“너는 아직도 돌아갈 생각 있어?”
질문은 분명 아테르에게 갔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시온도, 서린도, 세른도 바로 끼어들지 않았다. 이건 누가 대신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아테르는 생각보다 오래 침묵했다.
아버지 카이론의 얼굴이 아주 짧게 떠올랐다.
열 수 있다고 해서 열어서는 안 된다.
지키는 자는 미움받는 쪽에 서야 한다.
그 문장들은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죽은 기록수의 자리에서 남은 이름 조각과 잘린 순서도 이미 그의 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뒤로는,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낮게 말했다.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 자리로는 못 돌아갑니다.”
엘리아는 그 대답에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이제야 같은 배에 태울 만하네.”
시온이 피식 웃었다.
“기준 이상하네.”
“아니. 정확해.”
엘리아가 곧바로 받았다.
“반쯤만 온 사람 태우면 중간에 제일 먼저 배신하거든.”
서린이 그 말에 잠깐 시온을 봤다.
시온은 모른 척했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저 말은 아테르한테만 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방 안 누구든 마음 반쯤 빼두면 끝이라는 뜻이었다.
세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출발 전 정리해야 할 게 있습니다.”
모두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첫째, 좌표를 아는 사람은 이 방 안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둘째, 외곽 접속 전까진 제국식 흔적을 남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셋째, 지금부터는 누가 어느 조각을 들고 움직일지도 나눠야 합니다.”
엘리아가 짧게 웃었다.
“조용한 쪽이 입 여니까 제일 실무적이네.”
세른은 그 반응에도 별 표정이 없었다.
시온이 팔짱을 풀며 물었다.
“그럼 조각은 누가 들지.”
그건 가볍게 넘길 질문이 아니었다.
죽은 기록수 자리에서 남은 조각.
준 아스테르 이름이 남은 잔흔.
그리고 이제 막 발견된 길의 흔적까지.
이제 이들에게 남은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조각, 좌표, 해석, 기억이 서로 따로 나뉜 채 움직여야 하는 분할 보존의 상태에 가까웠다.
엘리아는 책상 위 조각을 한 번 보고 대답했다.
“이름 조각은 시온이 드는 게 맞아.”
아테르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세른도 이유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엘리아는 시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런 건 읽는 방식이 손에 밴 사람이 들어야 해.
겁먹고 너무 귀하게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함부로 굴리지도 않는 쪽.”
그다음 시선을 아테르에게 돌렸다.
“대신 길 쪽 표식은 네가 외우는 게 낫지.”
“왜죠.”
“넌 길 닫는 언어에 익숙하잖아.”
엘리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반대로, 지워진 길을 봤을 때 어디가 제일 수상한지도 제일 빨리 느낄 거야.”
아테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린이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역할분담까지 끝났네.”
“역할분담 아냐.”
시온이 말했다.
“그냥 더 덜 망하는 쪽으로 나누는 거지.”
“그게 역할분담이야.”
요나는 그 대화 사이에서 지도를 다시 훑었다.
“난 외곽 접속까지만 뺄게.
그 뒤 선은 네가 붙여.”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붙여놨어.
이름은 아직 안 줄 거고, 접속점 가서 줄게.”
시온이 그 말을 듣고 바로 미간을 좁혔다.
“왜.”
“혹시 너 잡히면 바로 팔릴까 봐.”
“너무하네.”
“사실이야.”
서린이 작게 웃었다.
“좋다. 오늘 제일 믿음직한 말이다.”
그렇게 말은 가볍게 오갔지만, 방 안 분위기는 이미 출발 직전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누가 뭘 들고, 어디까지 같이 가고, 어느 지점에서 갈아타고, 누구 이름을 어디까지 숨길지. 그건 더 이상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었다. 진짜 움직일 사람들만 하는 종류의 대화였다.
아테르는 항로 패드 위 희미한 외곽선들을 바라보다가 아주 조용히 숨을 뱉었다.
이제 이건 제국 안에서 닫을 수 있는 문 하나를 넘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발카르 가문과 승인원이 경계선 바깥으로 밀어냈던 방식의 길을, 자기 발로 거슬러 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두렵기만 하진 않았다.
시온은 조각을 안주머니 안쪽 깊이 다시 밀어 넣고 외투 단추를 채웠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손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덜 흔들리는 성질이, 이럴 때는 분명 도움이 됐다.
서린은 그런 시온을 한 번 본 뒤, 작게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진짜 떠나는 거네.”
시온이 대답했다.
“응.”
“후회는?”
시온은 아주 짧게 웃었다.
“출발 전에 물어볼 질문은 아니지.”
아테르는 그 말을 듣고도 웃지 못했다. 이번 출발은 단순 도주가 아니었다. 이 밤 안에 빠져나가지 못하면, 좌표를 읽은 사실 자체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 제국 쪽엔 봉쇄 명분이, 항구 바닥엔 현상금이 생긴다. 돌아가는 길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남은 길 전체가 더러워지는 쪽에 가까웠다.
엘리아가 과자 봉지를 다시 접어 서랍에 넣었다.
“좋아. 그럼 다들 표정 정리하고 나가.”
그녀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숨는 척하면서 제일 멀리 가는 애들이 오래 살아.”
문 바깥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래 가진 않을 거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중립 항구도시는 지워진 것들을 오래 품는 도시였지만, 그렇다고 무한히 숨겨주진 않는다. 특히 이름과 길이 같이 걸린 사안이라면 더 그랬다.
한 사람씩 움직일 준비를 마치기 시작했다.
시온은 이름 조각을, 아테르는 머릿속 좌표를, 서린은 즉흥적으로 바뀔 도피선을, 세른은 봉쇄망의 빈칸을, 요나는 당장 다음 접속까지의 연료와 시간을 챙기고 있었다.
아직 누구도 서로를 동료라고 부를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지워진 이름의 뒤를 따라,
잘려나간 길의 첫 조각이 남은 외곽 성단 쪽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