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모서리 너머의 얼굴
# 25화. 모서리 너머의 얼굴
다음 모서리까지 남은 거리는 길지 않았다.
문제는 짧다는 점 자체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쫓는 쪽도, 도망치는 쪽도 한 번 실수하면 바로 끝난다. 더구나 지금 이들이 밟고 있는 곳은 멀쩡한 통로가 아니라, 오래전에 잘려나간 외부 연결부와 반무너진 판별 구조가 겨우 이어진 경계 구간이었다. 발 하나 틀리면 아래는 길이 아니라 우주였고, 손 하나 잘못 뻗으면 아직 남아 있는 판별 반응까지 같이 죽을 수 있었다.
세른이 아주 낮게 말했다.
“속도 유지. 너무 빨라도 놓치고, 늦어도 놓칩니다.”
시온은 대답 대신 앞만 봤다.
방금 전 반사된 판면의 잔광이 아직 눈에 남아 있었다. 장비가 아니었다. 구조물 금속이 우연히 튄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지금 이 안쪽 어둠에서, 더 큰 조각을 손에 쥔 채 다음 멈춤 자리를 찾고 있었다.
아테르는 낮게 말했다.
“다음 모서리 뒤는 좁습니다. 저쪽도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근거리 채널 너머로 서린이 바로 받았다.
“좋네. 그럼 숨을 자리도, 도망칠 자리도 짧다는 거네.”
“맞아.”
시온이 짧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이 제일 가깝지.”
통신선 너머로 한지우 목소리가 다시 짧게 스쳤다.
“구조물 반응 한 번 더 올라간다. 오래 끌면 안 좋아.”
그 말은 단순한 재촉이 아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잃는 건 둘이었다. 먼저 지나간 손도 멀어지고, 이 구조물의 마지막 판별 반응도 같이 죽는다. 그러면 지금 손에 든 작은 파편은 물증으로 남아도, 그 물증이 이어져야 할 현장 자체는 닫힌다.
시온이 아주 낮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해.”
그건 조급함이 아니라 결론에 가까웠다. 이 다섯이 직접 여기까지 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시온은 흔적을 잃기 전에 읽을 수 있었고, 아테르는 남은 판별 논리를 구조로 바꿔 볼 수 있었고, 세른은 그 둘 사이의 순서와 시간을 붙잡고 있었고, 서린은 누군가 과하게 밀어붙이는 순간 잘라낼 수 있었고, 한지우는 이 전부가 돌아올 선체를 아직 잃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남에게 넘기거나 더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읽고, 지금 붙지 않으면 놓친다. 그게 이 현장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세 사람은 모서리 앞에서 동시에 속도를 늦췄다.
시온이 먼저 손을 들어 멈춤을 알렸다. 세른이 바로 뒤에서 발을 멈췄고, 아테르는 벽면 훼손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선체 쪽에 남은 서린도 채널 너머로 숨을 죽인 채 다음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정적.
그 뒤, 모서리 너머에서 숨이 하나 스쳤다.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이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길게 도망친 사람의 숨이라기보다, 무게 있는 걸 들고 계속 버티다 잠깐 멈춘 사람의 숨에 가까웠다.
시온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있네.”
이번엔 대답 대신, 모서리 너머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먼저 떨어졌다.
“거기서 더 오면 이쪽도 자를 수밖에 없어.”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굳었고, 채널 너머의 숨도 잠깐 멎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생각보다 젊었다. 하지만 힘이 약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겁먹고 내지른 경고가 아니라, 정말로 잘라야 할 선을 계산한 뒤 내뱉는 종류의 음성. 이 구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시온이 대답했다.
“그 조각 들고는 멀리 못 가.”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모서리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왔다.
“알고 있어.”
그 한마디에 공기가 바뀌었다.
도망치는 쪽도 자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더 큰 조각이 불안정하다는 것, 다음 판별부를 넘기기 전까진 안전하게 빠질 수 없다는 것, 지금 뒤쫓아온 이들이 단순 추적자가 아니라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테르가 아주 낮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이번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대신 모서리 끝 그림자 아래로 손 하나가 아주 잠깐 내려왔다가 사라졌다. 장갑 낀 손. 손등엔 오래 긁힌 자국들이 겹쳐 있었고, 그 아래 들린 판면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문양선이 스쳤다. 제국 승인원 장비의 규격과도, 동맹 측 현장 공작 도구의 결도 아니었다. 오래된 길을 직접 손으로 더듬어 온 사람 손이었다.
세른이 아주 낮게 말했다.
“혼자입니다.”
근거리 채널 너머로 서린이 바로 물었다.
“확실해?”
“예.”
세른은 짧게 답했다.
“반응이 하나뿐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서리 너머의 존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제국 집행대도 아니고, 동맹 쪽 회수반도 아니고, 여럿이 움직이는 바닥 브로커도 아니다. 혼자 이 길을 먼저 읽고 들어와, 더 큰 조각을 먼저 손에 넣고, 지금도 혼자 버티며 다음 이탈선을 계산하는 사람.
시온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제국도 아니고, 동맹도 아니지.”
모서리 너머에서 짧은 웃음 같은 숨이 흘렀다.
“그 둘이면 진작 사람부터 쐈겠지.”
선체 쪽에 남은 서린도 그 짧은 말 하나에 표정이 바뀌었을 터였다.
그 짧은 말 하나로 충분했다. 상대는 지금 직접 싸우러 온 게 아니었다. 목적은 여전히 회수와 이탈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조각을 먼저 가져간 손이고, 이 구조를 먼저 읽은 손이다. 한 번 틀리면 바로 적이 된다.
시온이 물었다.
“그 조각, 왜 가져갔어.”
이번엔 답이 조금 늦었다.
“남겨두면 죽으니까.”
“누가.”
“조각도.”
짧은 숨.
“길도.”
이번엔 아테르가 먼저 침묵했다.
그 말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짧아서, 이미 오래 그 결론 하나만 붙잡고 움직여 온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짧은 말 안에는 이 존재가 단순 절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그는 조각의 값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 길이 왜 남아 있고 왜 죽어 가는지도 아는 쪽이었다.
시온도 그걸 느꼈다. 그래서 더 성급하게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건 잡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저 손이 뭘 알고, 어디까지 읽었고, 왜 혼자 이 구조를 먼저 밟고 지나갔는지를 확인하는 쪽이었다.
구조물 안쪽에서 다시 한 번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한지우 목소리가 잡음 섞여 들어왔다.
“시간 없다. 안쪽 반응 또 꺼진다.”
세른이 곧바로 말했다.
“결정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더 밀면 충돌이 난다. 더 물러나면 놓친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쫓는 쪽과 쫓기는 쪽 모두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길이 먼저 죽는다.
시온은 모서리 너머 어둠을 보며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럼 하나만 먼저 확인하지.”
그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너도 준 아스테르 이름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이번엔 침묵이 더 길었다.
모서리 너머 그림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반응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다만 그 이름이 방금 처음 들은 소리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낮은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다.
“이름 때문에 온 건 아니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이름이 잘려 나간 자리를 봤기 때문에 왔지.”
그 말은 짧았지만 충분히 컸다.
시온은 더 묻지 못했고, 아테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준 아스테르를 쫓는 사람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잘려 나간 자리’를 보고 쫓아온 사람은 다르다. 그건 이름보다 구조를 먼저 본 사람, 사건보다 잘린 순서를 먼저 읽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근거리 채널 너머로 서린이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얘기가 되네.”
모서리 너머 존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순간, 들고 있던 더 큰 판면 가장자리가 어둠 속에서 아주 잠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완전한 양도는 아니었다. 위협도 아니었다. 다만 상대도 지금 이 대화를 완전히 끊을 생각은 없다는 뜻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구조물 더 안쪽에서 판별 반응 하나가 급격히 꺼졌다.
세른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지금입니다.”
뭘 뜻하는지는 누구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조각도 대화도 길도 셋 다 같이 놓칠 수 있었다.
시온은 모서리 너머를 향해 아주 낮게 말했다.
“도망칠 거면 지금이고.”
시온은 한 박자 숨을 골랐다.
“안 그럴 거면, 얼굴부터 보자.”
그리고 모서리 너머의 그림자가,
마침내 아주 천천히,
빛이 닿는 쪽으로 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