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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한지우의 배

# 18화. 한지우의 배 한지우의 이동선 안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겉보기엔 낡은 중거리 화물선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덧댄 흔적들이었다. 벽면 패널은 군데군데 원래 규격과 맞지 않는 부품으로 갈아 끼워져 있었고, 전원선 일부는 정식 배선이 아니라 우회한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어떤 건 전쟁 전 규격 같았고, 어떤 건 훨씬 나중에 뜯어온 민간 부품 같았다. 낡아서 방치된 배가 아니라, 낡아 죽지 않게 계속 손본 배. 시온은 그걸 보는 순간 한지우 냄새가 너무 진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시온이 선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부터 들을 것 같이 생겼네.” 한지우가 뒤에서 문 잠금을 확인하며 받았다. “생긴 게 아니라 맞아.”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 왼쪽 패널 기대지 마. 어제 다시 묶은 거야.” 시온이 손을 떼며 헛웃음을 쳤다.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지금 기대려 했으니까 지금 말하지.” 서린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딱 네 수준에 맞는 설명이다.” “너는 왜 남 말만 맞아.” “네가 너무 맞기 쉬워서.” 짧은 티키타카가 오가는 동안에도 한지우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외부 잠금 상태 확인, 수동 격벽 재체결, 접속 고리 해제 대기, 보조 전원 확인. 말과 손이 완전히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 아테르는 그걸 보면서, 이 여자가 말로는 대충 살아도 손으로는 절대 대충 살지 않는 종류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세른이 선실 구조를 한 바퀴 훑고 물었다. “주 추진기는 정상입니까.” 한지우는 그 말에 처음으로 세른 쪽을 제대로 봤다. “정상이라는 말이 어디까지를 뜻하는진 모르겠는데.” 그녀가 말했다. “폭발은 안 해. 지금은.” 짧은 정적. 시온이 작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쪽에선 상급이지.” 아테르는 그 대화를 듣고도 웃지 않았다. 폭발은 안 한다, 지금은. 그런 말을 상태 설명처럼 쓰는 세계. 이상한데, 동시에 이 배 안에선 아무도 그 말을 허풍으로 안 듣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전부터 계속 그를 흔들고 있었다. 제국 바깥의 질서는 허술한 게 아니라, 아예 다른 기준으로 정확하다. 한지우가 조종석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출발하면 한동안 잡음 심할 거야. 밖에서 항로 더듬는 놈들 있어서 노이즈 일부러 섞어놨거든.” 서린이 물었다. “좋네. 우리 귀도 같이 터지겠네.” “귀보단 추적이 먼저 터지는 게 낫잖아.” “그건 맞네.” 요나는 접속 고리가 완전히 풀리는 소리를 확인하고 한지우를 한번 봤다. “여기서부턴 네 구간이다.” “알아.” 그건 짧은 말이었지만, 인계처럼 들렸다. 시온은 그걸 들으며 늘 그렇듯 생각했다. 이쪽 인맥은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누가 어디까지 책임지는지는 말 몇 개로 끝난다. 대신 그 몇 개가 깨지면 다신 못 본다. 이동선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금속 선체 어딘가에서 낮은 마찰음이 길게 났고, 곧이어 외부 고정 장치가 완전히 풀리며 선체가 한 번 가볍게 기울었다. 창은 거의 없었지만, 바깥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오는 감각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히 실감됐다. 시온은 벽 쪽 손잡이를 잡고 낮게 말했다. “이번엔 어디까지 바로 가?” 한지우는 계기판을 건드리며 답했다. “바로는 못 가.” “중간에 한 번 더 죽은 표지 밟아야 해.” 아테르가 물었다. “죽은 표지?” 한지우는 그 표현이 낯설지 않다는 듯 바로 설명했다. “공식 기록에선 이미 사라진 접속 표식. 근데 실제로는 완전히 안 죽은 거.” 그녀는 계기판 위에서 좌표 두 개를 짧게 띄웠다. “이런 건 살아 있는 애들보다 오히려 덜 보여. 그래서 오래 써.” 아테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아가 말했던 `지워진 길`과 지금 자기가 밟고 있는 항로가 같은 계열의 언어라는 걸 더 선명하게 느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안 죽은 것. 기록에선 지웠는데 실제론 남아 있는 것. 이 세계는 지금 자기한테 그 언어를 계속 강요하고 있었다. 시온이 아테르 표정을 힐끗 보고 웃었다. “이제 좀 익숙한 얼굴 하네.” 아테르가 시선을 돌렸다. “좋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겠죠.” “당연하지.” 시온이 바로 받았다. “이쪽은 익숙해질수록 인생 망한 거야.” 한지우가 조종석 안쪽에서 코웃음을 쳤다. “너는 이미 늦었고.” “그건 부정 못 하겠네.” 서린은 그 짧은 말들을 들으며 선실 뒤쪽 적재함을 열었다. 안에는 예비 전원팩 둘, 절연포, 응급 패치 키트, 탄창은 아니지만 거의 그 비슷한 긴장감을 풍기는 공구함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무장선은 아니어도, 무장선처럼 살 준비는 해둔 배였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사람 살릴 준비랑 사람 때려눕힐 준비가 같은 칸에 있네.” 한지우가 대꾸했다. “이쪽에선 원래 붙어 있어.” 세른은 그 적재함 구성을 보고 짧게 판단을 끝낸 얼굴이었다. 과장 없이 필요한 것만 있다. 이건 허세가 아니라 반복해서 살아남은 배의 구성이다. 그는 시선을 조금 옮겨 한지우의 손놀림을 다시 봤다. 조작은 거칠어 보이는데 입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시온이 그걸 보고 슬쩍 말했다. “조용한 쪽이 또 감탄하네.” 세른은 시온을 보지 않고 답했다. “감탄은 아닙니다.” “그럼.” “이해 중입니다.” 그 말에 시온이 잠깐 입꼬리를 올렸다. 서린도 작게 웃었다. 아테르는 아무 말 없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대화가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세른은 지금 이 낯선 생존망의 규칙을 자기 식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선체가 한 번 더 가볍게 흔들렸다. 이번엔 단순한 출발 진동이 아니라, 접속점 바깥의 외부 항로와 맞물리며 생기는 미세한 튕김이었다. 배가 진짜 바깥으로 빠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한지우가 갑자기 말했다. “시온.” “왜.” “이번엔 정확히 뭘 들고 왔어.” 선실 안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시온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조각 이야기를 여기서 어디까지 풀지, 아테르와 세른 앞에서 어느 정도 말할지, 서린은 어디서 끊을지. 그 짧은 침묵 안에서 다들 각자 계산이 한 번씩 돌았다. 한지우는 그런 계산을 기다려줄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 냄새 말고.”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번엔 뭘 건드렸길래 제국 쪽 냄새까지 같이 묻었냐고.” 시온은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안주머니 위를 눌렀다. “이름 하나.”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 이름 앞뒤를 잘라낸 손.” 시온은 아주 짧게 덧붙였다. “문서만 들고 도망치면 끝날 일이 아니야. 그 손이 잘라낸 길이 남은 자리까지 직접 밟아야 뭐가 빠졌는지 보여.” 그 한마디는 이 배가 왜 필요한지도 다시 선명하게 했다. 여기서부턴 단순 은신이 아니라, 현장에 묶인 조각을 따라 잘린 접근 순서를 직접 밟아 가는 구간이었다. 한지우 눈빛이 처음으로 진짜로 가늘어졌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진짜 비싼 거네.” 아테르는 그 말이 단순히 돈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다. 이 여자가 말하는 `비싸다`는 값뿐 아니라, 위험과 추적과 살아남을 확률까지 한꺼번에 매기는 말이다. 한지우가 다시 물었다. “그 이름, 네 이름은 아니지.” 시온이 짧게 답했다. “아니야.” “살아 있는 사람 이름도 아니고?” 잠깐 정적. 이번엔 아테르가 시온보다 먼저 시선을 들었다. 한지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럼 죽은 이름이네.”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다. 선체 바깥에서 길게 마찰음 하나가 스쳤다. 배는 이미 접속점을 떠나고 있었고, 뒤로 돌아갈 길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지우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종간을 조금 더 깊게 밀며 낮게 말했다. “알겠어. 그럼 이제부터 더 조용히 가야겠네.” “이름이 죽은 이름이면, 이제 쫓기는 이유도 달라져. 잡으러 오는 쪽은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이름이 열 수 있는 길까지 같이 막으러 올 거야.” 시온은 그 말에 작게 숨을 뱉었다. 설명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필요한 수준의 전달은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아테르는 그 짧은 교환을 보며 확실히 알았다. 시온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대를 믿어서 태우는 게 아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어디서 끊어야 다 같이 안 죽는지를 재고 나서 움직인다. 그건 차갑다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오래 다듬어진 신뢰의 다른 형태였다. 배는 점점 더 바깥으로 나갔다. 정식 항로가 아닌 길, 죽은 표지를 밟으며 이어지는 우회선, 이름 대신 잔흔으로만 남은 접속들. 그리고 그 항로 끝엔, 지워진 길의 첫 실제 흔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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