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접속점의 얼굴
# 17화. 접속점의 얼굴
접속선이 멈춘 건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은 뒤였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이런 길에선 그 조금이 늘 신경을 건드린다.
시온은 엔진 떨림이 잦아드는 순간 바로 눈을 떴고, 서린도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세른은 애초에 완전히 잠들지 않았고, 아테르는 눈을 감고 있었을 뿐 이미 깨어 있었다.
요나가 조종석 쪽에서 짧게 말했다.
“도착이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배 안 공기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움직이는 중의 밀폐감이 아니라, 외부 구조물 어딘가에 접속했을 때 특유의 정지된 긴장. 오래된 선체와 낡은 도킹 고리가 서로 맞물릴 때 생기는 금속성 압박감이 벽 너머로 전해졌다.
시온이 제일 먼저 물었다.
“붙은 쪽 어때.”
요나는 짧게 패널을 훑고 답했다.
“살아 있긴 해.”
서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좋네. 전혀 안심 안 되는 표현이다.”
“이런 데선 저 정도면 좋은 소식이지.”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다.
외곽 접속점은 이름 그대로 살아 있는 항구가 아니라, 죽지 못한 길들이 억지로 이어지는 장소에 가까웠다. 전기가 완전히 안 나간 것만으로도 일단 절반은 성공인 셈이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좁은 선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바깥은 이전 접속층보다도 더 비어 있었다.
천장 조명은 몇 칸 건너 하나씩만 살아 있었고, 긴 접속교 벽면엔 오래전에 지워진 도크 번호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정식 표지판은 거의 없었고, 대신 낡은 방향 화살표와 덧칠된 경고문만 겹겹이 쌓여 있었다. 누가 마지막으로 여길 정식 시설이라고 불렀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공간이었다. 버려졌는데도 완전히 안 죽은 이유는, 서로 다른 시대의 접속 규칙과 설비가 여기서 반쯤 겹쳐 버텨왔기 때문이었다.
아테르는 바깥으로 한 걸음 나오자마자 멈칫했다.
이건 단순히 항구 바깥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버려졌는데도, 필요 때문에 완전히 죽지 못한 구조물. 제국이라면 비용 문제로 진작 폐쇄했거나, 권한 문제로 더 깊이 봉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애매하게 살아 있다.
그 모호함이 이곳 전체의 규칙처럼 느껴졌다.
요나가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간다. 말 줄이고.”
멀지 않은 곳, 접속교 끝쪽 어두운 대합칸 비슷한 공간에 누군가 기대 서 있었다.
처음엔 구조물 그림자인 줄 알았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얼굴이 잘 안 보였고, 몸선도 벽과 겹쳐 있었다. 그런데 시온은 두 걸음쯤 다가간 뒤에야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고, 동시에 누군지도 알아봤다.
“와.”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네가 나와?”
기대 서 있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짧게 잘라 올린 머리, 군데군데 기름때와 금속 가루가 묻은 작업용 재킷, 한쪽 손목에 아무렇게나 감아둔 절연 밴드. 표정은 심드렁했지만 눈빛만은 전혀 심드렁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자마자 값과 상태와 위험도를 동시에 재는 사람의 눈이었다.
한지우가 시온을 위아래로 한번 훑고 말했다.
“꼴이 왜 그 모양이냐.”
시온이 피식 웃었다.
“반가운 사람한테 할 첫말치곤 너무 정 없네.”
“반갑긴 하지.”
한지우가 건조하게 말했다.
“살아는 왔으니까. 근데 살아온 얼굴치곤 너무 비싸게 살아왔네.”
서린이 그 옆에서 작게 웃었다.
“시작부터 맞는 말만 하네.”
한지우의 시선이 그제야 서린에게 갔다.
“너도 왔네.”
“그러게.”
“그럼 이번 일은 진짜 귀찮은 거다.”
“응. 그것도 아주.”
짧은 대화 몇 마디뿐이었는데도, 아테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시온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알고, 여러 번 봐왔고, 적어도 시온이 위험한 걸 들고 왔을 때 어떤 얼굴이 되는지도 익숙하게 안다. 그리고 서린과도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니었다.
세른은 말없이 한지우의 손을 봤다.
손등엔 잔상처럼 남은 화상 자국과 오래된 금속 흠집이 있었다. 현장에서 장비를 직접 만지는 사람의 손이었다. 단순 브로커는 아니다.
한지우는 곧 시선을 아테르 쪽으로 옮겼다.
그때 처음으로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옷차림을 보는 게 아니라, 자세와 침묵, 숨을 고르는 간격을 보는 눈.
“이쪽은 뭐야.”
시온이 짧게 답했다.
“설명 길어.”
“길면 안 받아.”
“그래서 짧게 말하잖아.”
시온이 말했다.
“같이 안 죽으려면 필요한 쪽.”
한지우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아테르를 한 번, 세른을 한 번 더 보고 말했다.
“좋네. 네가 그런 말 할 정도면 진짜 이상한 조합이긴 하네.”
한지우가 그렇게 말한 건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접속점에서 사람을 태운다는 건 곧 자기 선로와 다음 죽은 표지 접근선까지 함께 걸겠다는 뜻이었다.
아테르는 그 말에 별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속으론 이 여자가 엘리아와 비슷한 종류라는 걸 직감했다. 다만 엘리아가 보관과 판독의 사람이라면, 이쪽은 이동과 장비의 사람이다. 물건과 사람을 같이 보고, 둘 다 버틸 수 있는지 먼저 계산하는 인간.
요나가 뒤에서 짧게 말했다.
“시간 없다.”
한지우가 손목 밴드를 한 번 고쳐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기다린 거야.”
그 말엔 이미 한 번 계산을 끝냈다는 뜻도 섞여 있었다. 여기서 이들을 안 태우면 길 하나를 보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들이 들고 온 조각이 가리키는 더 큰 선로는 통째로 놓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대합칸 안쪽을 가리켰다.
그 안엔 낡은 화물 카트 두 대와 반쯤 뜯긴 패널들, 그리고 접속선보다 조금 더 큰 중거리 이동선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겉면은 더 낡아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손이 많이 들어간 흔적도 분명했다. 임시 보강판, 외부 배선 우회, 수동 잠금장치 교체 흔적. 죽어가는 배를 억지로 살려 계속 쓰는 게 아니라, 죽지 않게 계산하며 붙들어 놓은 배였다.
시온이 그걸 보자마자 웃었다.
“이건 네 손 탔네.”
“당연하지.”
한지우가 말했다.
“남이 손댄 거였으면 너 안 태웠어.”
서린이 배 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겉보기보다 낫네.”
“그 말 제일 싫어.”
한지우가 즉시 받았다.
“겉보기도 충분히 낫거든.”
서린은 피식 웃었고, 시온은 그걸 보고 아주 잠깐 옛날 생각이 스쳤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한지우는 말로는 사람을 밀어내는데, 손은 제일 먼저 움직인다. 싫다고 욕하면서도 필요한 조정은 이미 끝내놓는 타입.
세른이 조용히 물었다.
“다음 이동선입니까.”
한지우는 그제야 세른을 정면으로 봤다.
“응. 근데 곱게 가진 못 가.”
그녀는 접속선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난 죽은 표지랑 아직 살아 있는 장비를 이어 읽는 쪽이거든. 이번 구간은 그것 없인 못 붙여.”
그녀가 말했다.
“외곽 성단 쪽으로 들어가는 길 중 두 개는 이미 죽었고, 하나는 아까부터 누가 뒤에서 더듬고 있어. 그래서 원래보다 더 바깥으로 돌아야 해.”
아테르가 낮게 물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게 만들려고 내가 여기 있는 거지.”
그건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테르는 순간적으로, 이 여자가 자기 세계의 귀족이나 승인원 관료들과는 정반대 방식으로 같은 종류의 확신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저 확신은 혈통이나 권한이 아니라, 반복해서 고쳐보고 살려보고 실패해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시온이 물었다.
“얼마나 위험해.”
한지우는 아주 태연하게 답했다.
“지금 네 옆에 서 있는 사람들 기준으론 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네 기준으론 평소보다 조금 더.”
“하나도 안 위로되네.”
“위로하러 온 거 아니야.”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사이, 접속점 어딘가 멀리서 금속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자연스러운 노후음 같았지만, 세른과 요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서린도 바로 숨을 죽였고, 시온은 본능적으로 한지우 뒤쪽 배치를 먼저 확인했다.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그래. 그 소리 때문에 오래 못 있어.”
요나가 짧게 욕을 씹었다.
“벌써 더듬나.”
“정확히는 아직 확신 못 한 쪽.”
한지우가 답했다.
“근데 두 번 더 소리 나면 확신한다.”
세른이 물었다.
“탑승 후 바로 출발 가능합니까.”
“가능하게 해놨어.”
한지우가 말했다.
“대신 타고 나면 중간에 내리는 선택지는 거의 없어.”
시온이 그 말을 듣고 웃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런 문장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다 같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린이 먼저 발을 뗐다.
“좋아. 그럼 타자.”
아테르는 그 짧은 말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나온 어떤 지시보다 더 단단하게 들린다고 느꼈다.
서린은 늘 이런 식이었다. 분위기가 늘어지거나 판단이 갈라질 틈이 생기면, 딱 필요한 길이만큼만 잘라서 앞으로 밀어버린다.
시온은 탑승 직전, 한지우 옆을 스치며 작게 말했다.
“빚 하나 더 지네.”
한지우는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원래 너 빚은 안 줄잖아.”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살아서 갚아.”
시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 선체보다 더 묵직하게 가슴 한쪽에 걸렸다.
그리고 다섯 사람은,
중립 항구도시 바깥에서도 더 바깥으로,
지워진 이름의 뒤에 남은 첫 길 조각을 쫓아
외곽 성단 쪽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