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누구의 것도 아닌 곳
# 30화. 누구의 것도 아닌 곳
선체가 구조물 외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을 때도, 안쪽 공기는 조금 전 현장의 떨림을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한지우는 조종석과 엔진 패널 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상태를 읽고 있었다. 선체 하부 한쪽은 방금 붕괴 여파로 잔진동을 먹었고, 외부 고정축 하나는 평소보다 느리게 응답하고 있었다. 당장 터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가롭게 오래 버틸 상태도 아니었다. 이 배는 지금 겨우 살아서 빠져나오는 데 최적화된 상태였지, 추적을 달고 정면 항로를 타기에 좋은 몸은 아니었다.
“속력 바로 못 올려.”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고정축 한 번 더 눌리면 선회각 틀어진다.”
서린은 벽에 기대 있던 자세를 풀며 짧게 물었다.
“추적선.”
세른이 바로 답했다.
“아직 직접 반응은 없습니다. 하지만 판별부 재가동 잔향은 남았습니다.”
아테르가 낮게 덧붙였다.
“직접 봉쇄보다 먼저, 주변 승인망이 이상 신호를 읽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온은 그 말들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배 안에 탄 사람은 여섯이었다. 조금 전까진 그 숫자 자체가 비정상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다들 다른 문제를 먼저 보고 있었다. 읽은 문장을 어떻게 넘길지, 추적이 붙기 전에 어디로 튈지, 카엘이 가져온 더 큰 조각을 언제 어떻게 다시 열지. 인원수보다 우선인 문제들이 이미 생겨난 뒤였다.
카엘은 선체 안 가장 구석진 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완전히 자리를 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금방 다시 뛰어내릴 사람처럼 몸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조각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고, 시선은 슬릿 바깥 어둠보다 선체 안 사람들의 동선을 더 자주 따라가고 있었다. 살아남는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아직 어느 쪽에도 몸을 다 맡기지 않은 사람의 시선이었다.
서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선택지 자르자.”
한지우가 코웃음 비슷하게 숨을 뱉었다.
“뭘 자를 것도 없지. 이 상태로 항구 들어가면 바로 찍힌다.”
세른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맞습니다. 방금 같은 반응을 일으키고 고정 항로를 타면, 제국 쪽이든 동맹 쪽이든 금방 패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테르는 더 차갑게 정리했다.
“엘리아 베른의 저장소로 바로 가는 선택지는 제외해야 합니다.”
짧은 정적.
그 말은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시온은 벽면에 등을 댄 채 눈을 감았다 떴다. 원래라면 지금쯤 바로 엘리아 얼굴부터 떠올렸을 것이다. 읽을 수 있고, 숨길 수 있고, 남은 값의 결을 아는 사람. 여태까지라면 조각을 들고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빨라서 안 되는 길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크게 반응을 건드린 이상, 엘리아처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적 쪽 계산에도 가장 먼저 들어간다.
서린이 조용히 말했다.
“저장소로 가면 끝이야.”
“알아.”
시온도 짧게 답했다.
“나도 그 생각부터 했으니까.”
“그래서 더 안 돼.”
그 한마디는 핀잔이 아니라 정리에 가까웠다.
카엘이 그 대화 끝에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엘리아.”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읽는 손 이름이야?”
시온은 바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잠깐 침묵한 뒤에야 짧게 말했다.
“읽을 수 있는 사람.”
카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 짧은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조각 가장자리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지금 중요한 건 엘리아가 누구냐보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 자체인 셈이었다.
아테르는 시온을 봤다.
“다른 길이 있습니까.”
시온은 여전히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하듯 고개를 조금 숙였고, 손이 습관처럼 재킷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이 한 번 헛돌다가, 안쪽 접힘 사이에서 오래 눌려 있던 작은 종이 하나가 걸렸다.
시온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한지우가 눈썹을 올렸다.
“뭐야.”
시온은 종이를 바로 펴지 않았다. 처음 보는 감촉이었다. 자기가 넣어둔 기억이 없는 종이였다.
서린이 먼저 물었다.
“네 거야?”
“모르겠어.”
시온이 낮게 말했다.
“처음 보는데.”
세른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저장소에서 나올 때, 엘리아 베른이 가까이 붙었던 순간이 한 번 있었습니다.”
짧은 정적.
시온이 눈을 들었다.
세른이 이어 말했다.
“그때 뭔가 건넨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때 넣어둔 것 같군요.”
이번엔 카엘도 조각에서 시선을 떼고 그쪽을 봤다. 아테르는 말없이 시온 손끝만 보고 있었고, 세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온은 그제야 접힌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안쪽엔 다른 설명 없이 단어 두 개만 적혀 있었다.
`하즈란`
그 아래 한 줄.
`아카`
한지우가 거의 반사처럼 반응했다.
“하즈란?”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사막 벨트 그쪽?”
시온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는 데야?”
“알지.”
한지우가 코웃음 비슷하게 웃었다.
“항구라고 부르기 민망한 데. 고철이 모래에 반쯤 파묻힌 채 굴러다니고, 멀쩡한 태그보다 가짜 태그가 더 빨리 도는 곳.”
서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기억났다.”
그가 낮게 말했다.
“누구 법도 끝까지 못 닿는 변방. 모래, 폐선체, 이동 장터, 밀수 연료. 숨기긴 쉽고, 살아서 빠져나오긴 더러운 곳.”
아테르는 종이 두 줄을 번갈아 보았다.
“아카는 뭐죠.”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른이 조용히 말했다.
“인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저희 쪽 기록엔 바로 걸리는 표기가 없습니다.”
카엘이 낮게 물었다.
“읽는 손이 남긴 거냐.”
시온은 종이를 접지도 못한 채 잠깐 침묵했다.
“그 필체야.”
그가 작게 말했다.
“근데 준 기억은 없어.”
서린이 시온을 잠깐 봤다.
“네 습관은 알고 있었겠지.”
그 말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난감해질 때 손부터 주머니로 가는 버릇. 지금 같은 순간까지 계산해서 미리 넣어뒀다면, 설명이 적은 것도 오히려 그 사람다웠다.
한지우가 종이를 한 번 더 보며 말했다.
“좋네. 행성 하나, 이름 하나. 진짜 더럽게 엘리아답다.”
“그래도 방향은 생겼습니다.”
세른이 말했다.
아테르는 여전히 `아카` 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무 적군요.”
“일부러겠지.”
시온이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지금은 그 이상 적으면, 들키는 쪽이 더 빨랐을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른의 시선이 패널 쪽으로 튀었다.
“반응 옵니다.”
한지우가 바로 몸을 돌렸다.
“뭐가.”
“뒤쪽 승인망 재점화.”
세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추적선입니다. 생각보다 빠릅니다.”
다음 순간, 선체 한쪽이 짧고 거칠게 떨렸다.
한지우가 욕설을 삼키듯 숨을 뱉으며 조종석 쪽으로 몸을 날렸다.
“씨, 벌써 쐈어.”
경고음이 늦게 울렸다. 벽면 패널 위로 붉은 선 하나가 비스듬히 번졌다. 방금 스쳐 지나간 건 직격은 아니었지만, 더 기다려 줄 여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서린이 벽에서 몸을 떼며 짧게 말했다.
“생각은 나중에 해. 일단 살아.”
아테르는 이미 옆 패널을 당겨 승인 흔적을 접고 있었고, 세른은 추적 각도를 읽기 시작했다. 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각을 안쪽으로 감췄다. 선체 안 공기는 방향을 정할 때의 침묵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침묵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시온은 접은 종이를 쥔 채 짧게 말했다.
“하즈란으로 간다.”
한지우가 대답 대신 엔진을 거칠게 깨웠다.
“얘기 끝났으면 꽉 잡아. 지금부터는 떨어지면 진짜 죽어.”
선체가 한 번 크게 기울었다.
조금 전까지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걸 고민할 틈조차 없어졌다. 사막 행성, 정체 모를 이름 하나, 그리고 엘리아가 남겨놓고 사라진 두 단어. 그걸 더 붙잡아 볼 시간은 추적선이 주지 않았다.
남은 건 도망치는 동안 방향을 잃지 않는 일뿐이었다.
선체가 천천히 항로를 틀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도망치는 선이 아니라, 일부러 한 번 죽은 화물선 잔해대 쪽을 스치고, 거기서 다시 각을 꺾어 나가는 회색 경로였다. 누가 봐도 빠른 길은 아니었다. 대신 흔적을 하나로 남기지 않는 길, 직선 추적을 짜증나게 만드는 길, 회색지대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몸에 익힌 길이었다.
하즈란이 바로 닿는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정 항로를 버리고 열기층 뒤쪽의 회색 벨트를 타면, 변방 쪽으로 접근하는 동안 적어도 한동안은 추적 계산을 흐릴 수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빠른 도착이 아니라, 거기까지 살아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이었다.
슬릿 바깥으로 별빛 대신 먼지 띠가 길게 스쳐 지나갔다.
저기서부터는 누가 먼저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먼저, 누구의 것도 아닌 곳에 닿느냐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