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놓아주지 않는 선
# 31화. 놓아주지 않는 선
첫 번째 충격은 선체를 부수려는 쪽이 아니었다.
남은 방향감을 먼저 망가뜨리려는 충격이었다.
한지우가 엔진을 거칠게 깨운 직후, 오른쪽 하부를 스치고 지나간 추적탄이 선체 외벽에 길고 얇은 열 자국을 남겼다. 직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배 전체가 한 번 비틀렸다. 조금 전까지 겨우 버티고 있던 외부 고정축 하나가 그 짧은 스침만으로도 응답을 늦췄다. 한 번 더 같은 식으로 먹으면, 이번엔 진짜로 선회각이 틀어질 수 있었다.
“좋아.”
한지우가 이를 악문 채 웃었다.
“이제 얌전히는 못 간다. 다들 뭐라도 잡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체가 아래로 한 번 꺼졌다가, 곧장 옆으로 비틀렸다.
시온은 벽면 손잡이를 붙잡는 동시에 아직 접지도 못한 종이를 재킷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하즈란`, `아카`. 설명은 두 단어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 단어가 지금은 어느 좌표보다도 또렷한 방향처럼 느껴졌다. 생각할 틈은 없었지만, 갈 곳 자체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세른이 패널에 반쯤 몸을 붙인 채 빠르게 말했다.
“뒤에서 둘입니다. 하나는 고정 추적, 하나는 벌려 들어옵니다.”
“끼워 잡겠다는 거네.”
서린이 낮게 말했다.
“예.”
세른이 짧게 답했다.
“하나는 겁주고, 하나는 회피선 읽는 쪽입니다.”
아테르가 벽면에 남은 흐릿한 승인 잔향을 보며 덧붙였다.
“방금 판별부 반응 기록이 이미 넘어갔을 겁니다. 단순 추격보다 확인 사격에 가깝습니다.”
“좋아 죽겠네.”
한지우가 중얼거렸다.
“그럼 더 보여주기 전에 튀어야지.”
바깥에서 두 번째 추적탄이 지나갔다.
이번엔 선체를 맞히지 않았다. 대신 일부러 가까운 거리에서 열만 쓸고 지나갔다. 경고였다. 멈추지 않으면 다음은 더 깊게 들어오겠다는, 잡는 손 특유의 여유 섞인 협박.
한지우 표정이 곧바로 구겨졌다.
“아, 씨. 저거 일부러 떨구네.”
배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조종석 위쪽 패널 하나가 순간적으로 꺼졌다 켜졌고, 슬릿 바깥으로는 먼지와 잔광이 뒤섞인 선 하나가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카엘은 그 와중에도 조각을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론 바닥 고정대에 몸을 걸고, 다른 손으론 품 안쪽을 더 단단히 감쌌다. 살아남는 데 익숙한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 지금 저 배를 대신 몰아 줄 수는 없어도, 어느 순간 몸을 던져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침묵은 아니었다.
시온이 낮게 물었다.
“정면으로 못 끊어?”
“지금 이 몸으로?”
한지우가 웃음기 없이 되받았다.
“무리해서 축 한 번 더 나가면 쟤네보다 우리가 먼저 죽어.”
서린이 짧게 끊었다.
“그럼 정면 승부 말고, 시야 끊는 쪽.”
세른이 이미 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죽은 화물선 잔해대까지 끌고 가면 잠깐은 자를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각도면 저쪽도 같이 들어옵니다.”
“들어오라 그래.”
한지우가 조종간을 틀며 말했다.
“쟤들보다 더 미친 선으로 박아 넣어 주면 되지.”
시온은 짧게 숨을 골랐다. 엘리아가 남긴 두 단어, 세른이 기억한 순간, 서린이 잘라낸 저장소, 그리고 지금 바깥에서 끈질기게 따라붙는 승인선. 모든 게 한꺼번에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단순해진 것도 있었다. 이제는 직선으로 도망치면 안 된다. 빠른 길이 아니라, 상대 계산을 한 번 어그러뜨릴 길이 필요했다.
그때 카엘이 처음으로 슬릿 바깥을 보며 낮게 말했다.
“뒤쪽 놈들, 군용 개조선이다.”
한지우가 짧게 받아쳤다.
“보면 알아?”
“엔진 소리가 달라.”
카엘이 말했다.
“한 놈은 겁준다. 한 놈은 끝까지 물려 한다. 잡는 손이 따로 있어.”
세른이 바로 물었다.
“그럼 잔해대 안쪽까지 물고 들어올까요.”
카엘은 잠깐 침묵했다.
“들어오긴 할 거다. 근데 깊게는 못 들어와.”
그가 낮게 말했다.
“살아남는 것보다 회수 보고가 먼저인 놈들 냄새야.”
그 말은 이상하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서린도, 한지우도, 시온도 굳이 되묻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판단은 설명보다 먼저 몸에서 나온다. 지금은 그런 감각을 하나라도 더 빌려야 할 때였다.
한지우가 이를 드러내듯 웃었다.
“좋아. 그럼 제일 비싼 길로 모셔 드리지.”
선체가 갑자기 위로 솟았다가, 곧장 왼쪽 아래로 눌렸다.
아테르는 벽면을 짚으며 짧게 숨을 삼켰다. 세른은 패널 숫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시선조차 흔들지 않았다. 시온은 손잡이를 더 세게 쥔 채 슬릿 바깥을 봤다. 지금은 읽는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시간인데도, 눈은 자꾸 다음 각을 먼저 좇고 있었다.
“들어온다.”
세른이 말했다.
“오른쪽 한 척 더 붙습니다.”
“좋아, 와 봐.”
한지우가 씹어 말하듯 내뱉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길 정해.”
바로 다음 순간, 선체가 죽은 화물선 잔해대 첫 외곽을 스치듯 파고들었다.
슬릿 바깥 풍경이 단번에 달라졌다. 텅 빈 우주 검은막 대신, 오래전에 뜯기고 타다 남은 거대한 화물선 골조가 회색 벽처럼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잘려 나간 적재링, 반쯤 접힌 외부 프레임, 안쪽이 드러난 엔진 하우징이 겹겹이 떠 있었다. 안전한 길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회색지대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고르는 길 같았다.
한지우가 낮게 웃었다.
“그래. 이런 데가 낫지.”
뒤를 물던 추적선 하나가 바로 각도를 죽이지 못하고 바깥 골조를 길게 긁었다. 금속 갈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고, 그 빛이 슬릿 바깥을 날카롭게 스쳤다.
세른이 즉시 말했다.
“첫 번째 속도 줄었습니다.”
“둘째는?”
서린이 물었다.
“아직 들어옵니다.”
카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잡는 손이네.”
시온은 그 말과 동시에 오른쪽 바깥 프레임 사이로 파고드는 다른 잔광을 봤다. 저건 겁주는 선이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끝까지 따라붙어, 회피 각을 기억하고 다음에 다시 물려는 놈의 선이었다.
“지우.”
시온이 짧게 불렀다.
“오른쪽 둘째 틈. 안 죽은 공간 있어.”
한지우가 바로 되묻지도 않았다.
“거리.”
세른이 패널을 보며 말했다.
“셋, 둘, 지금.”
한지우가 조종간을 비틀었다.
선체가 거의 긁히듯 잔해 프레임 안쪽으로 꺾여 들어갔다. 왼쪽 외벽 어딘가가 짧게 부딪히며 울렸지만 크게 깨지진 않았다. 대신 뒤따르던 추적선 하나가 그 각도를 끝까지 못 따라오고 바깥쪽으로 크게 벌어졌다.
“좋아.”
한지우가 거칠게 숨을 뱉었다.
“하나는 떼냈다.”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세른이 바로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더 날카로운 진동이 선체 하부를 훑었다.
이번엔 스침이 아니었다. 맞고 지나간 축에 가까웠다.
아테르가 몸을 겨우 고정한 채 말했다.
“하부 응답 떨어집니다.”
한지우 표정이 확 굳었다.
“아, 이건 진짜 싫은데.”
서린이 바로 물었다.
“얼마나 버텨.”
“계속 물리면 못 버텨.”
한지우가 짧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도망치면서도 살릴 각 같이 봐야 해.”
시온은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즈란은 아직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그 이름이 단순한 다음 목적지가 아니라, 살고 죽는 걸 가르는 선처럼 변해 있었다. 도착해야 한다. 도착한 뒤 뭘 찾을지, 그 안에서 뭘 잃을지는 나중 문제였다. 지금은 거기까지 살아 가는 게 먼저였다.
세른이 패널을 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한지우.”
“왜.”
“이 각도로 계속 틀면, 열기층 바깥을 스칠 수 있습니다.”
짧은 정적.
한지우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
“그건 숨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건데.”
“압니다.”
세른이 답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직선 탈출을 계속하면, 하부 축이 먼저 죽습니다.”
아테르가 그 말을 바로 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온전한 항로가 아니라, 추적 끊김과 강제 침하를 버틸 최소한의 구조입니다.”
“듣기만 해도 더럽네.”
한지우가 중얼거렸다.
카엘이 이번엔 선체 바닥 쪽을 보며 말했다.
“떨어질 거면, 살아서 떨어지는 쪽으로 골라.”
그 말이 끝나자 서린이 짧게 결론을 냈다.
“좋아. 잔해대 한 번 더 감고, 안 떼지면 열기층 바깥까지 탄다.”
한지우가 짧게 웃었다.
“이제야 말이 좀 되네.”
하지만 그 웃음 끝엔 아까와 다른 금이 가 있었다.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안 떨어지면 더 먼저 죽는다는 계산이 선 쪽이었다.
뒤쪽에서 다시 추적탄 빛이 번졌다.
이번엔 더 깊었다.
선체 하부 어디선가 짧고 둔한 파열음이 터졌다. 동시에 배가 아래로 확 꺼졌다가, 겨우 자세를 주워 담듯 다시 흔들렸다. 벽면 패널 셋이 한꺼번에 어두워졌고, 조종석 아래쪽에서 한지우 욕설이 갈리듯 튀어나왔다.
“됐다. 이제 선택 끝이야.”
세른이 바로 물었다.
“임계입니까.”
“넘었어.”
한지우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이제 안 떨어지면 오히려 죽어.”
짧은 정적.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추적을 떼기 위해 위험한 선을 탔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충격으로 그 위험한 선이 선택지가 아니라 유일한 생존선이 되어 버렸다.
시온은 재킷 안쪽에 눌린 종이를 한 번 더 느꼈다. `하즈란`, `아카`. 읽을 수 없는데도 놓치면 안 되는 선. 읽지 못해도 버려선 안 되는 종류의 결이 있다. 방금까지 구조물 안에서 붙잡았던 것이 그랬고, 지금 저 두 단어도 그랬다.
서린이 아주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좋아. 떨어진다.”
아테르는 더 말이 없었다. 세른은 이미 침하 각을 계산하고 있었다. 카엘은 조각을 품 안쪽으로 더 감쌌다.
한지우가 마지막으로 조종간을 틀었다.
“다들 꽉 잡아.”
그가 낮게 웃었다.
“이제부터는 도망이 아니라 낙하다.”
선체가 다시 한 번, 더 깊은 잔해 그림자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아래, 아직 보이지도 않는 사막의 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