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많은 것이 깨진 붉은 활주대
# 49화. 많은 것이 깨진 붉은 활주대
적열탄을 든 손이 높이 올라가는 순간, 중정 바깥 공기까지 같이 조여 들었다.
시온은 자기 심장보다 먼저 기체 진동을 느꼈다.
한지우가 고른 스키프는 가까이서 보니 더 형편없어 보였다. 선체 왼쪽은 오래전에 한 번 크게 긁혀 벌어졌다가 억지로 꿰맨 흔적이 있었고, 하부 부양판 둘 중 오른쪽은 뜨는 반응이 눈에 띄게 늦었다. 엔진 하우징도 낡은 금속 띠와 천 조각으로 몇 번이나 묶어 둔 티가 났다. 근데 한지우는 그걸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았다. 죽어 가는 데도 숨기는 게 없는 기체. 힘이 남은 만큼만 정확하게 반응하는 놈.
그가 손을 올리자, 조향봉과 보조 레버가 짧게 떨렸다.
“올라.”
그가 짧게 말했다.
시온은 더 묻지 않고 뒤쪽 보조 발판에 올랐다. 발바닥 아래로 얇은 금속 떨림이 바로 올라왔다. 불안정한데, 거짓말은 하지 않는 진동. 이 기체는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어디서 무너질지는 몸으로 미리 알려 줄 것 같았다.
반대편에선 카엘과 세른이 더 두껍고 둔한 활주기에 몸을 실었다. 선체는 무겁고 둔해 보여도 골조가 단단했고, 하부 프레임이 낮아서 잔해 지대 충격을 잘 버틸 것 같은 놈이었다. 세른은 올라타기 전 한쪽 조향축을 손끝으로 한 번 눌러 보고, 미세하게 틀어진 각도를 눈으로 재더니 별말 없이 자리를 잡았다. 카엘은 그런 계산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바로 몸을 낮춰 중심을 잡았다.
주변 현지 팀들은 훨씬 익숙했다.
어떤 팀은 스키프 옆구리에 부적처럼 금속 패를 몇 개 더 묶었고, 어떤 팀은 출발 전부터 옆 팀 기체를 어깨로 떠밀며 신경을 긁었다. 전년도 우승팀인지 이름값이 있는 팀 하나는 군더더기 없이 정비된 검붉은 활주기를 몰고 가장 앞선 줄에 섰고, 무모한 뜨내기 팀 둘은 벌써부터 너무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온은 그런 종류가 보통 제일 빨리 깨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붉은 천막과 임시 관람대 사이, 물장수와 도박꾼, 해체공들과 총잡이들까지 전부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 누구는 판돈을 쥐고 있었고, 누구는 이미 이름을 외치고 있었고, 누구는 오늘 밤 몇 팀이나 뒤집힐지부터 세고 있었다.
하룬은 출발선 옆에 서 있었고, 나심은 그보다 조금 뒤, 사람들 얼굴을 훑으며 배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같이 읽는 것처럼 보였다. 아카는 끝내 안쪽 그늘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시온은 멀리서도 그녀 시선이 출발선과 멀어지는 첫 루트를 먼저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높은 기둥 위에서 적열탄이 터졌다.
붉은 불꽃이 밤공기 위로 짧고 거칠게 터져 올랐고,
그 불씨가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 위로 떨어지는 순간,
열둘의 기체가 거의 동시에 튀어나갔다.
첫 충격은 소리보다 모래였다.
붉은 활주대 초입에서 스키프들이 일제히 부양판을 띄우자, 얇고 마른 모래가 벽처럼 일어났다. 시온은 앞을 완전히 잃기 직전, 한지우가 오히려 그 시야 죽는 순간을 먼저 파고드는 걸 느꼈다. 남들이 서로 위치를 확인하려 한 박자 늦는 그 찰나에, 한지우는 이미 가장 비어 있는 선을 몸으로 읽어 냈다.
왼쪽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어떤 팀 하나가 옆 기체를 밀어내려다 자기 부양판 끝을 먼저 박살냈다. 불꽃과 모래가 한꺼번에 튀었고, 누군가 욕을 지르기도 전에 그 팀 기체가 비스듬히 틀어져 활주선 바깥으로 처박혔다.
관중석 한쪽에서 비명과 환호가 동시에 터졌다.
“앞만 봐.”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옆은 내가 본다.”
시온은 바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붉은 활주대는 그냥 평평한 모래길이 아니었다. 재시장 외곽 바닥을 다져 얇은 금속선과 굳은 유리질 지면을 군데군데 섞어 둔, 속도를 내게 만들면서도 한번 틀리면 바로 미끄러지게 하는 구간이었다. 겉으로 보면 다 비슷한 선인데, 모래 입자 흐름과 바람 방향, 다른 기체가 남긴 흔적에 따라 버티는 선이 조금씩 달랐다.
시온은 자기 앞 모래 흐름이 어느 선에서 얇아지고 어느 선에서 갑자기 눌리는지 보기 시작했다. 누가 막 지나간 자리인지,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 어디가 다음 충돌점이 될지. 아직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대신 몸이 먼저 읽었다.
“오른쪽 두 줄 뒤가 비어.”
그가 말했다.
한지우가 묻지도 않고 그쪽으로 기체를 눕혔다.
스키프가 모래벽 가장자리를 스치듯 파고들었다. 바로 앞에서 두 팀이 서로를 밀어내다 선체를 부딪쳤고, 한 팀은 조향을 잃은 채 활주대 바깥으로 돌았고, 다른 한 팀은 엔진이 울컥거리며 속도를 잃었다. 한지우는 그 틈을 거의 칼날처럼 잘라 지나갔다.
시온은 그 순간 뒤늦게 숨을 쉬었다.
미친 조종이었다.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남들이 박살나는 순간을 미리 읽고 거길 통로로 바꾸는 조종.
북쪽 바깥선에선 카엘과 세른 조가 아직 선두는 아니었다. 대신 그 둔해 보이던 활주기가 생각보다 덜 흔들렸다. 남들이 초반 속도에 취해 부양판을 거칠게 띄울 때, 카엘은 기체를 억지로 더 밀지 않았다. 세른이 짧게 손짓하면 그만큼만 각을 바꿨고, 덕분에 잔충돌이 몰리는 바깥 가장자리에서도 선이 잘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 아끼는 거지?”
카엘이 짧게 물었다.
“지금 깨지면 끝이야.”
세른이 답했다.
“활주대는 길어 보이지만, 버리는 팀이 먼저 쌓이는 구간이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쪽에서 스키프 하나가 옆구리를 크게 긁으며 튀어 올랐다. 탑승자 하나가 균형을 잃고 거의 떨어질 뻔했고, 카엘은 본능적으로 그쪽 충돌선 밖으로 기체를 밀어 냈다. 활주기는 느렸지만 단단했다. 얇고 빠른 놈들이 비틀릴 때, 저 기체는 그냥 버텨 냈다.
중정 관람대 쪽에선 이름들이 더 크게 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전년도 우승팀 이름을 외쳤고,
누군가는 외지인 두 팀에 더 큰 야유를 보냈고,
누군가는 벌써 돈줄이 바뀌었다고 소리쳤다.
루하이는 붉은 천막 난간에 매달리듯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진짜 미쳤네.”
그가 중얼거렸다.
“여긴 초반부터 사람 걸러내네.”
서린은 대답 대신 활주대 끝쪽을 노려봤다.
“초반에 많이 깨질수록 뒤가 더 정확해져.”
아테르가 낮게 말했다.
“열기층까지 갈 손만 남기려는 거겠지.”
루하이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기분 나쁘게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활주대 중반에 들어서자, 살아남은 팀들 사이 간격이 아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모한 뜨내기 팀 둘 중 하나는 이미 활주선 바깥에 처박혀 뒤집혔고, 밀수꾼 팀 하나는 초반 충돌은 피했지만 엔진 반응이 죽어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반대로 전년도 우승팀으로 보이는 검붉은 활주기는 군더더기 없이 가장 바깥 단단한 선을 타며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지우는 그 팀을 한번 스치듯 보고 말했다.
“저건 초반부터 기체가 다르다.”
시온도 봤다.
너무 좋은 기체라기보다,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틴 사람이 계속 고쳐 쓰면서 완성한 느낌. 빠르고, 낮고, 반응이 망설이지 않았다.
“붙을 수 있어?”
시온이 물었다.
한지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향봉을 아주 짧게 비틀어 스키프 떨림을 읽더니 낮게 말했다.
“지금은 안 붙어.”
그가 말했다.
“이놈은 버티는 선부터 맞춰야 해.”
시온은 그 답이 좋았다. 무리해서 선두를 쫓다 깨지는 게 아니라, 이 기체가 살 수 있는 선을 먼저 찾는 쪽. 그게 지금 한지우답기도 했다.
활주대 후반부로 접어들자, 바람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앞에서 일어난 모래기둥이 시야를 한 번에 가리진 않았지만, 살아남은 기체들의 선을 더 교묘하게 흔들었다. 겉보기엔 넓은 평원인데, 실제로는 다음 구간 진입 전 마지막으로 사람을 거르는 체 같은 자리였다.
시온은 바로 알아챘다.
왼쪽은 모래가 얇고, 오른쪽은 방금 전 충돌 때문에 아래 굳은 판이 드러났다. 겉으론 오른쪽이 더 단단해 보여도, 저런 구간은 다음 순간 기체가 튀어 오른다.
“왼쪽 셋째.”
그가 바로 말했다.
“지금은 저기가 덜 죽어.”
한지우가 웃지도 않은 채 그 선을 물었다.
바로 옆에서 다른 팀 하나가 오른쪽 노출판을 탔다. 처음 반 박자는 빨라 보였다. 근데 곧 선체가 아래에서 한 번 크게 튀었고, 조향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그 짧은 어긋남 하나로 뒤 팀 부양판이 옆구리를 긁었고, 두 기체가 동시에 균형을 잃었다.
한지우는 그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아주 짧게 말했다.
“맞네.”
시온은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크게 들어왔다.
지금 이 활주대에선,
자기 눈이 단순 보조가 아니라
진짜로 기체를 살리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북쪽 선에선 카엘과 세른도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세른은 무너진 팀들이 남긴 잔해 각도와 활주 흔적을 보며 다음 빈 선을 짚어 줬고, 카엘은 기체가 버틸 만큼만 거칠게 밀었다. 둘은 눈에 띄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먼저 박살나는 팀들이 쌓일수록 오히려 순위가 올라오는 쪽이었다.
“셋 남았다.”
세른이 짧게 말했다.
“앞에?”
“우릴 막을 수 있는 쪽.”
카엘은 대꾸 대신 활주기 코를 더 낮췄다.
활주대 끝이 가까워질수록, 살아남은 팀들은 더 이상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다음 구간 진입선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진짜 질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건 겨우 첫 번째 체에 불과하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멀리서 폐선체 잔해 지대 첫 골조가 어둠 속에 솟아 있는 걸 봤다.
붉은 활주대가 속도로 사람을 걸러냈다면,
다음은 길 읽기로 걸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쪽부터는,
자기 역할이 더 커질 거다.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다.”
시온은 바로 답했다.
“알아.”
그 순간, 붉은 활주대 마지막 굴곡을 넘으며 살아남은 기체들이 거의 동시에 다음 구간 입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선 여전히 금속 깨지는 소리와 욕설이 터지고 있었고,
앞에선 폐선체 잔해 그림자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중정에선 아직도 외침과 판돈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불씨 질주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