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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열린 것처럼 보인 길들

# 50화. 열린 것처럼 보인 길들 붉은 활주대 마지막 굴곡을 넘자, 속도보다 먼저 그림자가 달라졌다. 붉은 모래 위에 길게 눕던 기체 그림자들이 끊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솟아 있는 건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모래에 반쯤 박힌 폐선체 골조, 뒤집힌 적재함, 뜯겨 나간 엔진 외피, 휘어진 연결 프레임, 오래전에 식어 굳은 금속 판들이 길처럼 보이는 선과 벽처럼 막히는 면을 동시에 만들고 있었다. 폐선체 잔해 지대. 시온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긴 속도를 늦추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곳이 아니라, 속도를 어디서 죽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살아남는 곳이다. 한지우도 같은 걸 읽은 모양이었다. 활주대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던 손이 잔해 지대 초입에 닿기 직전 아주 짧게 기체를 눌렀다. 스키프 코가 살짝 내려가며 부양판 높이가 한 단계 죽었다. 속도는 여전히 빠른데,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긴장이 걸렸다. “이제 말해.” 그가 짧게 말했다. “보이는 대로 말하지 말고, 안 죽는 쪽 먼저.” 시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앞을 읽었다. 잔해 지대는 겉으론 빈틈이 많아 보였다. 오른쪽엔 넓게 열린 틈이 있었고, 정면엔 부서진 선체 외벽 사이로 곧게 뚫린 길처럼 보이는 구간이 있었다. 근데 그런 데는 대개 이유가 있다. 너무 좋아 보이는 길은 이미 여러 팀이 먼저 몰렸거나, 밑바닥 하중이 무너졌거나, 다음 굴곡에서 사람을 먹는다. 왼쪽 아래로 기울어진 좁은 선 하나. 거긴 표면이 더러워서 처음엔 길처럼 안 보였지만, 모래 흐름이 덜 깨져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누가 큰 기체로 밀고 지나간 흔적도 없다. 저건 빠른 길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다음 충돌에 휘말릴 선은 아니다. “왼쪽 밑.” 시온이 바로 말했다. “넓은 데 말고, 더 더러운 쪽.” 한지우가 묻지도 않고 그 선을 물었다. 스키프가 기울어진 금속판 아래를 거의 긁듯 파고들었다. 바로 오른쪽, 겉으로 가장 좋아 보이던 열린 틈엔 검붉은 활주기 하나와 밀수꾼 팀 기체 둘이 동시에 들어가고 있었다. 선두권 팀들이라 더 욕심냈을 거다. 그 다음 순간, 앞쪽 하중이 한번 꺼졌다. 보이지 않던 판 하나가 아래로 주저앉으며, 가장 앞 기체 코가 비스듬히 박혔다. 뒤따르던 두 팀이 피할 틈도 없이 각도를 틀었고, 그중 하나 부양판이 뜯겨 나가며 금속음이 거칠게 터졌다. 한지우는 그 바깥을 스치며 아주 짧게 말했다. “좋다.” 그 한마디가 시온 어깨를 더 단단히 세웠다. 북쪽 선에선 카엘과 세른도 활주대와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엘은 이제 기체를 밀기보다 버티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고, 세른은 앞선 팀들이 들어간 틈이 아니라 그 틈이 무너지고 난 뒤 새로 생긴 선을 먼저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갔느냐보다, 누가 무너지면서 다음 길을 열어 줬느냐를 읽는 눈이었다. “정면은 곧 닫혀.” 세른이 낮게 말했다. “오른쪽 골조 밑으로 붙어.” 카엘은 거의 반사처럼 각을 눕혔다. 활주기 옆면이 휘어진 프레임과 한번 스쳤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짧게 튀었지만, 두꺼운 골조 덕에 기체는 찢기지 않았다. 반대로 바로 앞 얇은 활주기 하나는 같은 각도로 못 버티고 옆 패널이 반쯤 벗겨졌다. “이래서 이놈 골랐네.” 카엘이 중얼거렸다. 세른은 짧게만 답했다. “여긴 빠른 놈보다 안 찢기는 놈이 오래 가.” 뒤쪽에선 아직 활주대 충돌을 겨우 넘긴 팀들이 잔해 지대 초입에서 다시 한 번 크게 걸러지고 있었다. 빠른 기체일수록 이 구간을 얕잡아보고 깊게 박았다. 반대로 너무 느린 기체는 열린 틈이 닫히기 전에 자리를 못 잡았다. 시온은 이제야 이 경기 2구간이 왜 필요한지 몸으로 이해했다. 붉은 활주대가 속도로 사람을 걸렀다면, 여긴 길을 읽는 감각과, 기체가 어디까지 버티는지를 같이 본다. 한지우 앞엔 세 갈래가 동시에 열렸다. 하나는 위로 올라가는 골조 사면, 하나는 중앙 아래를 가로지르는 낮은 틈, 하나는 왼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대신 흔적이 적은 선. 시온은 빠르게 셋을 훑었다. 위쪽은 좋아 보였다. 너무 좋아 보여서 걸렸다. 금속 면이 드러난 만큼 미끄럽고, 다음 순간 옆 충돌을 맞으면 바로 아래로 떨어질 선이다. 중앙 낮은 틈은 지금은 비어 있다. 근데 바로 앞 먼지가 이상하게 아래로 빨리고 있었다. 저건 안쪽이 뚫린 게 아니라, 한 번 꺼질 자리다. 왼쪽 우회선은 멀다. 대신 바퀴 자국 대신 가벼운 긁힘만 남아 있다. 큰 기체는 못 지나가고, 지금 자기들 스키프 정도만 겨우 닿을 선일 수 있다. “왼쪽 크게.” 시온이 말했다. “멀어도 저기.” 한지우는 이번엔 정말 한 박자도 안 쉬었다. 스키프를 크게 눕혀 모래와 금속 사이 좁은 경계선으로 미끄러뜨렸다. 선체 아래서 금속 가루가 튀었고, 오른쪽 부양판이 한 번 늦게 들리며 기체가 순간적으로 기울었다. 시온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근데 한지우는 그 찰나를 기다렸다는 듯 조향봉을 비틀어 중심을 다시 눌렀다. 스키프가 거의 옆으로 미끄러지듯 돌아 나가며, 남들이 욕심낸 두 갈래를 한 번에 바깥으로 버렸다. 뒤에서 큰 충돌음이 났다. 누군가 중앙 낮은 틈으로 밀고 들어가다 아래 판과 함께 반쯤 처박혔고, 그 뒤를 따르던 팀 하나가 상부 골조를 긁으며 그대로 튀어 올랐다. 금속 파편이 밤공기 위로 흩어졌고, 관중 쪽에선 이번에도 환호와 욕설이 동시에 터졌다. 루하이는 천막 난간 끝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아예 입을 벌렸다. “저걸 읽는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아테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읽는 사람만 살아남게 만든 거겠지.” 서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근데 시온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 시선이 한지우 조종과 시온 지시가 맞물리는 지점을 계속 보고 있다는 걸. 아카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폐선체 지대 안으로 들어온 뒤부턴 열기층 구간보다 오히려 이쪽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진짜와 가짜 불씨가 아니라, 진짜 길과 길인 척하는 틈을 가르는 눈처럼. 북쪽에선 카엘과 세른이 선두권 바로 뒤까지 치고 올라왔다. 전년도 우승팀 검붉은 활주기가 여전히 앞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다음 자리는 이미 엉켜 있었다. 무모한 뜨내기 팀 하나는 활주대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어도 여기서 선체를 반쯤 뜯겼고, 밀수꾼 팀 하나는 좁은 틈에 끼인 채 뒤 팀 길을 함께 막고 있었다. “앞에 둘, 곧 같이 죽어.” 세른이 말했다. “그럼?” “붙지 말고 떨어져. 죽는 방향만 봐.” 카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앞 기체 하나가 왼쪽으로 무너지면 빈 선이 열리고, 오른쪽으로 박히면 오히려 다 같이 막힌다. 그 차이를 기다리는 게 세른 방식이었다. 몇 초 뒤, 진짜로 앞쪽 팀 하나가 버티려다 골조 끝에 옆구리를 먼저 긁었다. 선체가 기울며 왼쪽으로 무너졌고, 바로 그 순간 세른이 짧게 말했다. “지금.” 카엘이 활주기 코를 눌러 그 붕괴 바깥선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느린 줄 알았던 기체가 그 순간만큼은 가장 짧은 선을 물었다. 시온은 멀리서 그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저 둘은 화려하지 않다. 근데 이런 구간에선 오히려 저런 쪽이 더 무섭다. 잔해 지대 중반부에 들어서자, 살아남은 팀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열둘 중 절반은 이미 뒤로 밀렸거나 멈췄고, 남은 팀들도 다 멀쩡하진 않았다. 누구는 부양판 한쪽이 죽었고, 누구는 외장이 뜯겼고, 누구는 아직 빨랐지만 다음 충격을 한 번 더 버틸 수 있을지가 불분명했다. 한지우 스키프도 멀쩡하진 않았다. 오른쪽 부양판 반응은 아까보다 더 늦어졌고, 선체 아래선 금속이 얇게 갈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근데 치명적인 곳은 아직 안 나갔다. 한지우는 그 상태를 아는 사람처럼 더 무리하지도, 쓸데없이 아끼지도 않았다. “두 구간째 가면 더 죽어.” 그가 말했다. 시온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건 기체 걱정이 아니라 사람 얘기였다. 열기층 불씨 지대까지 가면, 이제부터는 속도와 길 읽기만으론 안 끝난다. 진짜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자기와 아카, 세른 같은 눈이 더 깊게 걸리는 구간일 거다. 바로 그때였다. 시온 눈앞, 다음 골조 뒤 그림자에서 검붉은 활주기 꼬리가 한번 번뜩였다. 전년도 우승팀. 그 팀은 선두를 유지한 채 직선처럼 보이는 상단 루트를 타고 있었다. 근데 시온은 그 선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모래가 아니라 금속가루가 아래로 너무 곱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건 버티는 판이 아니라, 겉만 버티는 척하는 판에서 자주 보이는 흐름이었다. “저 위 꺼져.” 시온이 거의 반사처럼 말했다. “곧 무너져.” 한지우가 고개도 안 돌린 채 물었다. “확실해?” 시온은 짧게 답했다. “응.” 한지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스키프를 상단 루트가 아니라 바로 아래, 더러워서 아무도 안 탈 것 같은 좁은 선으로 눌렀다. 그리고 정확히 세 박자 뒤, 위쪽 골조판이 크게 갈라지며 검붉은 활주기 앞쪽이 아래로 꺼졌다. 군중 전체가 한 번에 숨을 삼켰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그 팀도 노련해서 곧장 기체를 틀어 버티고 있었다. 근데 선두를 여유롭게 지키던 흐름은 깨졌다. 한지우는 그 아래선으로 파고들며 아주 짧게 말했다. “좋아.” 시온은 그 한마디가 이번엔 더 뜨겁게 들어오는 걸 느꼈다. 잔해 지대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쪽 어둠 너머로, 공기 자체가 조금씩 일렁이는 게 보였다. 금속과 모래 냄새 사이로 타는 냄새가 얇게 섞여 올라왔다. 열기층 불씨 지대. 아직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 다음 구간은 벌써 여기까지 영향을 밀어 넣고 있었다.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다음부턴 네가 먼저다.” 시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앞쪽 일렁이는 공기를 한번 더 봤다. 붉은 활주대에선 한지우 손이 먼저였고, 폐선체 잔해 지대에선 둘이 같이 길을 살렸고, 이제 다음 구간부턴, 진짜와 흉내를 가르는 눈이 더 앞에 나와야 한다. 시온은 짧게 말했다. “안 놓쳐.” 그 순간, 살아남은 기체들이 거의 동시에 잔해 지대 마지막 굴곡을 빠져나가며, 열기층 불씨 지대 입구를 향해 길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뒤에선 아직도 금속 깨지는 소리와 욕설이 살아 있었고, 앞에선 뜨거운 공기와 흐릿한 빛들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중정 쪽 판돈과 외침은 더 커지고 있었다. 불씨 질주는, 이제 진짜 시험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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