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살아 있는 척하는 불빛들
# 51화. 살아 있는 척하는 불빛들
잔해 지대 마지막 굴곡을 빠져나오는 순간, 공기부터 달라졌다.
시온은 처음엔 그게 열이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두 번째 숨부터는 아니었다.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때리는 게 아니라, 눈앞 거리감 자체를 어긋나게 만들고 있었다. 멀리 있는 게 가까워 보이고, 가까운 게 금방 밀려나는 식의 흔들림. 열기층 불씨 지대는 단순히 뜨거운 곳이 아니라, 보는 감각 자체를 조금씩 비틀어 놓는 구간이었다.
유리화된 지면이 멀리서부터 검푸르게 번들거렸고, 그 위를 얇은 붉은 빛들이 곳곳에서 깜빡였다. 어떤 건 바닥에 붙어 있었고, 어떤 건 공기 위에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어떤 건 방금 꺼질 듯 약했다가도 다음 순간 갑자기 살아나는 척했다.
시온은 그걸 보는 순간, 이 구간이 왜 마지막에 놓였는지 몸으로 이해했다.
여기선 빨리 온 손보다,
속지 않는 손이 더 중요하다.
한지우도 속도를 먼저 죽였다. 잔해 지대에서 끝까지 버텨 낸 스키프는 이미 오른쪽 부양판 반응이 한층 더 늦어져 있었고, 엔진 떨림도 아까보다 거칠었다. 근데 그 기체조차 열기층 초입에선 함부로 밀 수 없었다. 바닥은 단단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미세하게 들떠 있었고, 곳곳에 식어 굳은 유리질 지면과 아직 열을 품은 금속 파편이 섞여 있었다.
“이제 진짜로 말 먼저 해.”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보이면 바로.”
시온은 대답 대신 앞을 봤다.
불빛은 너무 많았다.
아까까지는 길을 고르면 됐다.
근데 지금은 길이 아니라 불빛 자체가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그 부름들 중 절반은 살아 있는 척하는 쪽이다.
오른쪽 멀리, 유리질 바닥 위에 놓인 불빛 하나가 먼저 눈에 띄었다. 다른 것보다 화려했다. 붉은 기가 또렷했고, 가까이 가면 금방이라도 손안에 들어올 것처럼 쉬워 보였다.
시온은 오히려 그게 먼저 걸렸다.
너무 잘 보이는 건 대개 이유가 있다.
너무 쉽게 살아 있는 척하는 것도.
“오른쪽 저건 아니야.”
그가 바로 말했다.
“너무 먼저 보여.”
한지우는 곧장 스키프 코를 약간 바깥으로 틀었다.
바로 뒤를 따르던 팀 하나가 그 불빛 쪽으로 거의 반사처럼 튀었다. 전년도 우승팀은 아니었다. 잔해 지대를 기적처럼 버티고 살아 나온, 속도는 빠른데 아직 감각은 덜 가라앉은 팀이었다.
그 팀 기체가 불빛 앞에 가까워지자, 붉은 반응이 오히려 더 커졌다.
관중석 쪽에서 누군가 먼저 환호했다.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탑승자 하나가 몸을 기울여 그 불빛을 집는 순간, 그 빛은 손안에서 너무 쉽게 번졌다.
그리고 바로 죽었다.
시온은 멀리서도 봤다.
살아 있는 불씨처럼 버틴 게 아니라,
손에 잡히자마자 다 타 버린 미끼 같은 꺼짐.
그 팀 기체는 잠깐 멈칫했고, 그 찰나를 버티지 못했다. 옆에서 진입하던 다른 스키프 하나가 그 선을 스치며 들어오자, 균형이 무너졌고, 두 기체가 동시에 유리질 바닥 위로 크게 미끄러졌다.
한지우가 낮게 말했다.
“좋다.”
그건 잔혹해서가 아니라,
시온 말이 맞았다는 확인이었다.
시온은 그 한마디에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
이 구간에선 자기 눈 하나가,
그냥 길을 읽는 보조가 아니라
누가 속고 누가 안 속는지를 가른다.
북쪽 조금 앞에선 카엘과 세른도 열기층 지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활주기는 둔하지만 안정적이었다. 뜨거운 공기 일렁임에 바로 흔들리지 않았고, 세른은 속도를 더 죽이면서도 시선을 더 멀리 보냈다. 불빛 자체보다, 그 불빛 주위 공기와 바닥 반응을 먼저 읽고 있는 얼굴이었다.
“화려한 건 다 버려.”
그가 낮게 말했다.
“남는 쪽만 봐.”
카엘이 짧게 물었다.
“남는 걸 어떻게 구분하는데.”
세른은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죽는 척을 안 하는 쪽.”
그 말은 이상하게도 아카가 했을 법한 말처럼 들렸다.
카엘은 그 순간, 세른이 지금 읽는 게 단순 계산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챘다. 기록과 구조, 반복 패턴을 너무 많이 봐서 오히려 저런 종류의 거짓말에 익숙한 눈. 아카가 직감으로 보는 걸, 세른은 다른 방식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열기층 지대 중반부엔 불빛이 더 많아졌다.
어떤 건 땅에 박힌 금속 조각 끝에서 타고 있었고,
어떤 건 깨진 유리층 아래에 갇혀 있었고,
어떤 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론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진짜와 가짜, 잔향과 미끼가 한꺼번에 널려 있었다.
시온은 이제 억지로 전부 보지 않았다.
대신 살아남는 반응이 뭔지를 먼저 찾았다.
쉽게 커지지 않는 빛.
손을 타기도 전에 자기 존재를 다 들키지 않는 빛.
열기층 왜곡을 통과해도 형태가 급하게 무너지지 않는 빛.
그러다 왼쪽 아래, 금속 파편과 유리질 지면이 만나는 경계에서 아주 낮은 붉은 점 하나가 눈에 걸렸다.
처음엔 빛이라기보다 상처 같았다.
너무 작고, 너무 둔하고, 일부러 안 보이게 남아 있는 것처럼.
근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한 번 걸리자 자꾸 거기서 안 떨어졌다.
주변 불빛들이 다 한 번쯤 살아 있는 척 흔들릴 때,
저건 그냥 버티고 있었다.
“왼쪽 아래.”
시온이 낮게 말했다.
“작은 거.”
한지우는 바로 묻지 않았다.
대신 스키프를 그쪽으로 천천히 눌렀다. 너무 급히 들어가면 오히려 아래 유리층이 미끄러질 수 있다는 걸 아는 조종처럼, 마지막 구간에선 초반 활주대보다 훨씬 더 아끼는 손이었다.
바로 그때, 오른쪽 바깥에서 검붉은 활주기가 다시 살아난 선으로 끼어들었다.
전년도 우승팀.
잔해 지대에서 한 번 흐름이 깨졌어도 완전히 죽진 않았다. 오히려 여기까지 오며 다시 선두권으로 붙어 왔다. 그 팀도 이제 화려한 빛들을 거의 거르기 시작했고, 이쪽과 비슷한 방향으로 선을 좁히고 있었다.
시온은 그게 싫었다.
저 팀은 단순히 빠른 팀이 아니다.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감각도 있다는 뜻이다.
“붙는다.”
시온이 낮게 말했다.
한지우가 짧게 물었다.
“같은 거 봐?”
시온은 검붉은 활주기 기수 방향과 자기 눈이 걸린 붉은 점을 번갈아 봤다.
“아마.”
한지우는 조향봉을 아주 짧게 조였다.
“그럼 먼저 확인만 한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시온은 한지우가 이 구간을 어떻게 버티는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활주대에선 남이 깨지는 틈을 통로로 썼고, 잔해 지대에선 길이 무너지는 방향을 읽었고, 여기선 욕심을 반 박자 늦춘다. 먼저 잡으려 드는 대신,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살아서 붙는 쪽.
북쪽 선에선 카엘과 세른도 같은 흐름을 읽은 듯했다. 세른 눈이 잠깐만 왼쪽 아래를 스쳤고, 카엘은 그 눈길만 보고 기체를 아주 미세하게 꺾었다.
루하이는 난간 끝에서 거의 비명을 삼키듯 말했다.
“저 셋 다 같은 데 보는 거 아냐?”
아테르가 아주 낮게 답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진짜가 시작되는 거지.”
서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진짜를 먼저 본 손이 누구냐.
그건 이제 경기 안 점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 판까지 흔들 수 있었다.
아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온은 아카가 정확히 뭘 보고 있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근데 적어도 다른 화려한 불빛들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보였다.
그 정적이 오히려 시온 심장을 더 크게 울렸다.
맞다.
저거다.
근데 바로 그 순간,
열기층 아래 공기가 한번 크게 일그러졌다.
아까까지 바닥 가까이만 흔들리던 왜곡이 갑자기 위로 치솟듯 번졌고, 낮게 붙어 있던 불빛 셋이 한꺼번에 더 크게 살아나는 척 흔들렸다. 너무 노골적인 변화였다. 자연스러운 흔들림이라기보다, 누군가 판 전체 호흡을 한 번 뒤틀어 놓은 것처럼.
한지우가 짧게 욕했다.
“들어온다.”
시온은 바로 앞만 봤다.
왼쪽 아래의 작은 붉은 점은 여전히 크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처럼 공기가 뒤틀리는 순간에도 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더 확실했다.
진짜는 살아 있는 척하지 않는다.
그냥 버틴다.
“그대로.”
시온이 말했다.
“큰 거 보지 말고, 밑에 작은 거.”
한지우가 대답 대신 스키프를 더 낮췄다.
검붉은 활주기도 거의 같은 순간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북쪽에서 카엘과 세른이 타는 활주기는 한 박자 늦지만 더 안정된 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팀 셋이,
마침내 거의 같은 불씨 후보 앞에서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시온은 알았다.
여기서부터는,
이 경기의 규칙만으로는 안 끝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