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무너지는 쪽만 보이던 길
# 54화. 무너지는 쪽만 보이던 길
판이 경기이기를 그만둔 순간부터, 살아남는 방식도 바뀌었다.
시온은 그걸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알았다.
한지우가 탄 스키프는 이미 경기선이 아니라 붕괴선 바깥을 긁고 있었다. 원래 복귀 손들이 타야 할 붉은 유도선은 열기층 붕괴와 함께 절반이 죽었고, 남은 절반도 너무 멀끔해서 오히려 위험했다. 누군가 일부러 살려 둔 미끼일 수도 있었다. 한지우는 그런 선을 아예 버렸다. 살아 있는 길이 아니라, 막 무너지고 있는 쪽에서만 잠깐 드러나는 선을 탔다.
그래서 더 위험했고,
그래서 더 맞았다.
시온은 뒤 발판에 반쯤 기대듯 몸을 낮춘 채 손안 불씨를 꽉 쥐었다.
진짜 불씨는 여전히 낮고 끈질기게 살아 있었다. 가짜처럼 번쩍이진 않았지만, 손바닥 안쪽에 박힌 맥박처럼 계속 존재를 밀어 올렸다. 그래서 시온은 더더욱 이걸 뺏기면 끝이라는 걸 몸으로 알고 있었다. 에테라이트를 구할 길도, 아카와 연결될 다음 선도, 지금 이 사막 한가운데서 자기들이 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진짜도 전부 이 불씨 하나에 걸려 있었다.
뒤쪽에서 검붉은 활주기가 붙었다.
전년도 우승팀은 경기에서 지더라도 판에서는 안 지겠다는 사람들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가짜 불씨를 집은 손이 한 번 미끄러졌어도, 앞 조종사는 여전히 노련했다. 열기층이 뒤틀릴수록 오히려 더 바깥선으로 붙으며, 한지우 스키프가 살아남기 위해 고를 수밖에 없는 선을 같이 읽어 들어왔다.
“계속 온다.”
시온이 낮게 말했다.
“봐.”
한지우가 짧게 답했다.
“쟤들이 우리 따라오는지, 우리가 못 빠질 데 밀어 넣는지.”
시온은 바로 뒤를 다시 훑었다.
검붉은 활주기는 단순히 따라붙는 속도가 아니었다. 뒤를 밟는 척하면서 조금씩 각도를 죽이고 있었다. 그냥 빼앗을 생각이면 더 빠르게 들이밀었을 거다. 지금 저건, 앞선 스키프를 살 길 없는 병목으로 몰아넣고 난 뒤에 잡겠다는 손에 가까웠다.
“둘째야.”
시온이 말했다.
“우릴 좁은 데 밀어.”
한지우가 짧게 웃었다.
“그래서 우승했나 보네.”
그 말과 함께 스키프가 갑자기 더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시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쪽은 길처럼 안 보였다. 유리질 지면이 반쯤 들떠 있었고, 열기 왜곡 때문에 바닥 높낮이도 읽기 어려웠다. 경주선 안쪽만 타던 팀이라면 절대 안 고를 선이었다.
근데 한지우는 오히려 그걸 골랐다.
병목으로 몰리기 전에,
길 아닌 데로 먼저 빠져 버리는 쪽.
검붉은 활주기도 곧장 따라오려 했다.
그 순간, 바깥 지면 아래 숨은 금속 파편이 크게 한 번 튀었다. 한지우 스키프는 이미 속도를 죽인 상태라 간신히 버텼지만, 뒤 활주기는 진입각이 더 깊었다. 선체 아래에서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졌고, 활주기 코가 아주 미세하게 들렸다.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근데 반 박자는 늦었다.
시온은 그 짧은 어긋남 하나가 얼마나 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좋아.”
그가 낮게 말했다.
“아직 좋아할 때 아냐.”
한지우가 답했다.
“앞 봐.”
앞쪽 지형은 더 엉망이었다.
열기층 불씨 지대 바깥으로 빠지는 외곽선은 본래 복귀용이 아니라 관리용, 회수용, 비상 우회용 선들이 억지로 이어진 형태였다. 금속 구조물과 유리질 지면, 타다 식은 모래층이 맞물려 있어서 한 번 잘못 물면 기체가 통째로 들리거나, 반대로 바닥에 빨리듯 박힐 수 있었다.
시온은 이제 길을 찾는 게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선들 중 아직 한 번은 버틸 쪽을 골라야 했다.
오른쪽은 너무 깨끗했다.
누가 일부러 회수용으로 남겨 둔 선일 수 있었다.
정면은 넓은 대신 아래 열이 너무 강하게 들끓고 있다.
왼쪽 아래, 끊긴 난간 그림자 밑으로 더러운 띠 하나가 이어진다.
“왼쪽 아래.”
시온이 바로 말했다.
“난간 그림자 밑.”
한지우는 주저 없이 그쪽으로 눌렀다.
스키프 하부가 낮게 갈리며 불꽃이 짧게 튀었다. 오른쪽 부양판은 거의 죽기 직전처럼 한 박자씩 밀렸지만, 한지우는 오히려 그 늦은 반응을 계산해 중심을 맞췄다. 기체가 먼저 버티는 게 아니라, 조종이 기체를 대신 버티는 쪽이었다.
북쪽에선 카엘과 세른이 더 크게 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그 둘은 처음부터 한지우 조를 바로 따라붙기보다, 무너지는 선 바깥의 더 넓은 우회선을 먼저 잡았다. 세른은 검붉은 활주기가 잠깐 늦어진 것도 봤고, 지금 한지우가 어디로 빠지는지도 봤다. 하지만 똑같이 따라가면 둘 다 잡힌다. 오히려 조금 더 크게 돌아야, 나중에 합류할 각이 나온다.
“붙을 수 있어?”
카엘이 물었다.
세른은 앞쪽 붕괴 흐름과 아래 지형 높낮이를 빠르게 눈으로 쓸었다.
“지금 바로는 안 돼.”
그가 말했다.
“근데 저쪽도 결국 아래로 떨어져. 우리가 먼저 내려가면 만날 수 있어.”
카엘은 군말 없이 활주기 코를 더 낮췄다.
둔한 줄만 알았던 기체가 이럴 때 좋았다. 급하게 꺾는 건 느려도, 한번 무게를 실으면 바닥을 물고 버텼다. 화려한 선은 못 타도, 무너지는 지형 바깥을 끝까지 긁고 가는 쪽이었다.
관람대 위는 이미 경기장이 아니라 난장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박꾼 몇은 자기 판돈표를 움켜쥔 채 아직도 이걸 경기처럼 보려 했고, 해체공들과 총잡이들은 오히려 더 빨리 상황을 읽고 뒤로 빠졌다. 루하이는 난간에서 반쯤 내려와 서린 옆으로 붙었다.
“이제 뭐가 먼저야?”
그가 물었다.
“불씨냐, 사람 빼는 거냐.”
서린은 아래에서 한지우 조와 카엘 조가 갈라지는 선, 검붉은 활주기가 다시 복구하는 각도, 그리고 열기층 바깥 그림자 셋이 이동하는 속도를 한꺼번에 읽고 있었다.
“둘 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불씨 들고 있는 손이 안 죽어야 하고, 그 손이 어디로 빠지는지도 놓치면 안 돼.”
아테르는 그 옆에서 더 멀리 보고 있었다.
하룬 쪽 사람들만이 아니다.
판이 깨진 순간부터, 경기장 바깥의 다른 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보를 먹는 손, 진짜를 가로채려는 손, 자히르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숨는 손. 이 불씨 하나가 경기 점수를 넘어 더 큰 값이 되는 순간, 하즈란 전체가 냄새를 맡기 시작한 거다.
나심은 마침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망이 아니라 정리였다. 이 판이 이미 주최 측 통제를 벗어났다면, 이제 남는 건 피해를 누구 책임으로 만들고 어떤 값을 다음 판으로 넘길지 계산하는 일이다. 반면 자히르는 끝까지 자리에서 안 움직였다.
그 침묵이 시온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서린과 아테르에겐 충분히 남았다.
그 사람은 아직 이 판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보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아카는 여전히 나히라 곁에 있었다.
근데 이제 그녀는 경기장 안을 보지 않았다.
불씨를 쥔 손이 어디로 빠지는지,
그 손을 따라 어떤 손들이 붙는지,
그걸 보고 있었다.
시온은 그걸 직접 볼 순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아카가 단순히 경기 결과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진짜가 어느 손에 들어갔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다음엔 누가 그 손을 부러뜨리려 드는지를 보게 된다.
바로 그때, 앞쪽 외곽선이 한 번 더 크게 내려앉았다.
왼쪽 난간 그림자 밑을 타던 선이 갑자기 끊기며 아래쪽 유리층이 갈라졌다. 한지우는 욕 대신 짧게 숨을 삼켰고, 스키프를 거의 세우듯 꺾어 반대쪽 죽은 금속 프레임으로 체중을 넘겼다. 기체 전체가 한번 크게 울렸고, 시온은 손안 불씨를 놓치지 않으려 팔에 더 힘을 줬다.
검붉은 활주기도 다시 붙었다.
이제는 대놓고 앞길을 막으려는 각도였다.
“온다.”
시온이 말했다.
한지우는 이번엔 짧게 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키프 진동을 한 번 듣더니 말했다.
“붙이면 죽고, 빠지면 산다.”
그건 시온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한테 내리는 결론 같기도 했다.
그다음 순간,
한지우는 검붉은 활주기가 막아 세우려는 병목 앞에서 오히려 더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래였다.
거의 바닥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열에 뒤틀린 외곽 아래쪽 죽은 사면.
경기 손이라면 안 타는 선.
근데 지금은 경기 손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손만 타는 선.
시온은 숨이 막혔다.
“거기 타도 돼?”
한지우가 짧게 말했다.
“지금은 돼야 돼.”
스키프가 그대로 아래 죽은 사면으로 떨어지듯 미끄러졌다.
뒤쪽에서 검붉은 활주기가 잠깐 멈칫했다.
노련한 팀이어도, 저 선은 경기 안에선 선택 안 하던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 찰나,
카엘과 세른 활주기가 위쪽 넓은 우회선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두 선이,
마침내 같은 아래쪽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온은 알았다.
지금부터는 경기 복귀가 아니라,
진짜를 들고 빠져나가는 사람들끼리
같은 탈출선 위에 모이게 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