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55화. 진짜를 쥔 손만 버티는 선

# 55화. 진짜를 쥔 손만 버티는 선 아래 죽은 사면으로 떨어지듯 미끄러져 내려온 순간, 기체들이 내는 소리부터 달라졌다. 위쪽에선 아직도 경기장 비슷한 소리가 남아 있었다. 터지는 열기, 깨지는 유리층, 뒤늦게 질러대는 관중, 누가 망했는지 세는 소리. 근데 이 아래선 달랐다. 여기서부터는 구경꾼한테 보여 주는 판이 아니라, 진짜로 안 죽고 빠져나갈 사람만 타는 선이었다. 한지우는 스키프를 억지로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반쯤 추락하는 각을 그대로 먹인 채, 아래 죽은 사면이 밀어주는 방향으로 선체를 흘렸다. 오른쪽 부양판은 거의 죽어 있었고, 밑바닥은 계속 갈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기체는 버티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는 쪽으로 살아남고 있었다. 시온은 손안 불씨를 더 깊게 감쌌다. 진짜 불씨는 여전히 조용했다. 가짜처럼 손 안에서 번쩍이지 않았고, 잡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근데 계속 살아 있었다. 그 조용함 때문에 오히려 더 확실했다. 지금 이 사면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안 죽는다면, 이건 진짜다. “앞에 꺾인다.” 시온이 낮게 말했다. 한지우는 짧게 답했다. “알아.” 사면 아래쪽은 길처럼 안 보였다. 끊긴 외곽 프레임, 반쯤 꺼진 유리질 층, 금속 잔해가 모래에 박힌 선들이 얽혀 있어서, 잘못 보면 전부 막다른 길 같았다. 근데 시온은 이제 이런 데서 진짜 길이 어떻게 생기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멀끔한 선이 아니라, 막 죽은 구조물 옆에 잠깐 생기는 더러운 틈. 살아 있는 길은 늘 보기 좋지 않았다. “오른쪽 말고 아래 왼쪽.” 그가 바로 말했다. “깨진 프레임 안쪽.” 한지우가 스키프 코를 기울였다. 선체 아래에서 금속 갈리는 소리가 길게 찢어졌다. 시온은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지만, 한지우는 손을 안 풀었다. 죽은 사면 아래에서 방향을 바꾸는 건, 조향보다 감각에 가까웠다. 보이는 길을 트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다가 아직 안 죽은 면을 몸으로 하나씩 확인하는 쪽. 뒤쪽 위에서 검붉은 활주기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노련했다. 잠깐 멈칫했어도 끝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다만 아까처럼 병목으로 모는 방식은 못 썼다. 지금 이 아래선 병목 자체가 오래 안 버틴다. 그래서 그 팀은 이제 더 노골적으로 붙었다. 앞을 막는 대신, 한지우 스키프가 다음 방향을 틀 때 옆을 긁어 불씨를 떨어뜨리려는 각. “이번엔 빼앗는 쪽.” 시온이 짧게 말했다. 한지우는 그 말에 웃지도 않았다. “그럼 더 쉬워.” 시온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았다. 몰아넣는 손은 복잡하다. 근데 빼앗으려는 손은 결국 붙어야 한다. 붙는 순간, 한지우 같은 조종사는 오히려 읽기 쉽다. 북쪽 넓은 우회선에선 카엘과 세른 활주기가 진짜로 아래로 합류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선이었다. 둔한 활주기라서 가능한 면도 있었다. 얇고 빠른 기체면 진작 옆 패널이 뜯겨 나갔을 자리였는데, 카엘 쪽 기체는 무겁고 둔한 만큼 이런 죽은 사면에선 오히려 덜 튀었다. “앞 보인다.” 카엘이 낮게 말했다. 세른은 한지우 조가 물고 있는 더러운 틈과, 그 뒤를 따라붙는 검붉은 활주기 각도, 그리고 그 바깥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 둘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지금 바로 붙으면 같이 말려.” 그가 말했다. “한 번 더 내려가서, 저쪽이 꺾일 때 옆선 먹어.” 카엘은 짧게 물었다. “우리도 지금부터 경기 아니지?” 세른은 아주 짧게 답했다. “진짜 들고 나가는 쪽이 규칙이야.” 그 말은 차갑게 정확했다. 관람대 위에선 이제 경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보다, 누가 진짜를 집었는지 묻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루하이는 난간 끝에 붙어서 거의 이탈선 전체를 눈으로 훑고 있었고, 서린은 이미 손이 아니라 사람 흐름을 읽고 있었다. 누가 경기 붕괴를 틈타 아래로 내려오고, 누가 아직 위에서 상황을 보며 기다리는지. “둘 내려온다.” 서린이 아주 낮게 말했다. 아테르가 곧장 물었다. “하룬 쪽입니까.” “아직 모르지.” 서린이 답했다. “근데 불씨가 아래로 빠졌으면 곧 전부 아래 냄새 맡아.” 아테르는 시선을 더 멀리 뻗었다. 그 말은 맞았다. 진짜가 경기 규칙 밖으로 이탈하는 순간, 그 진짜를 쥔 손도 같이 시장 규칙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면 이제부터 붙는 손들은 경기 참가자가 아니라, 진짜를 노리는 손들이다. 나심은 여전히 계산 중이었고, 자히르는 끝까지 안 움직였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놓친다는 건 다르다. 아테르는 그 침묵이 단순 방관이 아니라, 아직 어느 선에서 개입할지 정하지 않은 사람의 침묵일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시온 쪽 아래 사면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엔 왼쪽이 아니라 앞쪽이었다. 깨진 프레임 안쪽 바닥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그 위에 쌓인 금속 파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지우는 욕도 안 하고 조향봉을 비틀었다. 스키프가 거의 옆으로 누운 채 파편 흐름 바깥을 스쳤고, 시온은 손안 불씨가 미끄러지지 않게 팔 전체를 죄었다. 바로 뒤에서 검붉은 활주기가 같은 파편 흐름을 맞았다. 노련한 조종사는 바로 선체를 세웠지만, 뒤 탑승자가 한번 크게 흔들렸다. 손을 뻗어 스키프 옆을 잡으려던 각이 무너졌고, 활주기 코도 한순간 밖으로 밀렸다. 한지우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스키프를 더 안쪽이 아니라 오히려 아래쪽 끊긴 프레임 밑으로 밀어 넣었다. 시온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저 선은 아래로 죽은 것 같아도, 한 번만 버티면 반대쪽 외곽으로 빠지는 구멍이 있다. “거기 뚫려?” 그가 짧게 물었다. 한지우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안 뚫렸으면 지금 연다.” 스키프가 그대로 어두운 프레임 밑으로 파고들었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한순간 시야가 완전히 죽었고, 열기층 붉은 빛도 뒤로 밀려났다. 시온은 숨을 죽인 채 불씨만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두운 프레임 바깥으로 새는 빛이 보였다. 살았다. 아직은. 동시에 위쪽 넓은 우회선에서 카엘과 세른 활주기가 그 아래쪽 출구와 나란히 붙기 시작했다. 세른이 먼저 그걸 봤다. “지금.” 그가 낮게 말했다. 카엘은 활주기 무게를 그대로 실어 바깥쪽 죽은 프레임 아래로 내려붙었다. 완전히 같은 선은 아니었지만, 출구를 나오면 한지우 조와 같은 외곽선으로 합쳐질 각이었다. 뒤쪽 검붉은 활주기도 다시 선을 물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처음처럼 여유가 없었다. 하나는 어두운 프레임 밑으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위쪽에서 내려오며 합류하고 있다. 이쯤 되면 누굴 먼저 막아야 하는지조차 빠르게 정해야 한다. 시온은 그걸 느끼며 짧게 숨을 골랐다. 드디어 둘이 붙는다. 한지우와 시온. 카엘과 세른. 이 경기 시작 전에 따로 불렸던 두 팀이, 이제는 경기 밖 탈출선에서 진짜를 들고 같은 방향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불씨를 둘러싼 판은 더 커질 것이다.
응원은 셈이야 — 순위도, 압박도 아니야.

댓글

셈이야 — 순위도, 압박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