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같은 항로 위
# 16화. 같은 항로 위
접속선은 생각보다 오래 달렸다.
엔진 소리는 낮고 고르게 깔려 있었지만, 그 아래 가끔씩 끊기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선체를 타고 올라왔다. 오래된 배 특유의 습관이었다. 고장은 아니지만, 언제 고장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종류의 소리.
앞칸에는 시온과 서린이 자리를 잡았고, 뒤쪽 적재칸 경계에 아테르와 세른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 요나는 조종석 겸 통신석에 가 있었다. 좁은 배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 거리를 둔 배치였지만, 솔직히 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 숨소리가 들리는 범위.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도망치는 동안은 말 없이도 괜찮았다. 할 일이 있었고, 긴장이 입을 대신 닫아줬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고, 당장 쫓기지 않는 시간이 오면,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다른 종류의 긴장이 차기 시작한다.
시온이 먼저 침묵을 깼다.
“잠 안 자?”
서린 쪽으로 한 말이었다.
“이런 데서 자면 못 일어나.”
“뭔 소리야. 너 예전에 수거선 적재칸에서도 잤잖아.”
“그건 아는 배였으니까.”
시온은 피식 웃었지만 더 밀진 않았다.
서린이 말한 건 맞았다. 아는 배와 모르는 배는 잠이 달랐다. 아는 소리가 나면 몸이 놓이는데, 모르는 소리가 나면 뇌가 끄지 않는다.
뒤쪽에서 세른이 낮게 말했다.
“항로 이탈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있습니까.”
요나가 조종석 쪽에서 대답했다.
“없어.”
짧은 정적.
“정확히는, 이 배에 항로 추적기가 붙어 있긴 한데, 지금 가는 쪽은 공식 항로가 아니라서 비교할 기준 자체가 없어.”
세른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방향이 맞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감.”
시온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됐다. 이런 배에서 정확성 따지면 정신만 상해.”
세른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지만, 표정엔 명확히 동의하지 않는 결이 남아 있었다.
아테르는 그런 세른을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방금 전에도, 탑승 순서를 정할 때도, 언제나 다음 한 수를 제일 먼저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계산의 기준이 되는 항로 자체가 흔들리는 상태였다. 세른에게 그건 꽤 불편한 상황일 것이다.
아테르가 낮게 말했다.
“세른.”
“예.”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른은 아주 짧게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알고 있습니다.”
그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시온은 그 짧은 교환을 놓치지 않았다. 아테르가 세른을 진정시킨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도 불안해서 말한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떤 식이든, 저 두 사람 사이에는 시온과 서린 사이와는 다른 종류의 줄이 있었다.
서린이 그 분위기를 읽고 아주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배 안에 먹을 거 있어?”
요나가 짧게 웃었다.
“적재칸 왼쪽 아래.”
서린이 일어나서 적재칸 쪽으로 갔다.
낡은 철 상자를 열자 안에 밀봉된 식량 패킷 몇 개와 물이 들어 있었다. 고급은 아니지만, 먹을 수는 있는 물건.
“좋네. 비상식량이네.”
“비상이니까.”
서린은 패킷 하나를 뜯어 시온 쪽으로 던졌다.
시온이 받아 들고, 그다음 하나를 아테르 쪽으로도 내밀었다.
아테르가 잠깐 서린을 봤다.
서린은 별 표정 없이 말했다.
“배고프면 판단력 떨어져.”
아테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받았다.
세른에게도 하나가 갔다. 세른은 받아 들고 조용히 봉인을 뜯었다.
누가 나눠주고 누가 받느냐는, 이상하게도 지금 이 배 안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서린은 자기가 나눠주는 쪽을 택했고, 아테르는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신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같이 먹는 사이라는 건 인정한 셈이었다.
시온이 패킷을 뜯으며 말했다.
“궁금한 거 하나 물어도 돼?”
아테르 쪽을 본 건 아니었지만, 모두 어디로 향한 말인지 알았다.
“뭡니까.”
아테르가 담담하게 받았다.
“너 왜 온 거야.”
직접적이었다.
서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시온이 이어 말했다.
“질문을 좀 더 정확히 하면.
너는 지금 여기 있을 필요 없잖아. 원래라면.”
아테르는 패킷을 한 입 베어 문 뒤 천천히 삼키고 대답했다.
“원래라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요.”
“그건 나한테도 맞는 말인데.”
“알고 있습니다.”
시온이 웃었다.
“그게 답이야?”
아테르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잘못된 순서를 확인하러 온 겁니다.
승인원으로서.”
“그리고?”
“확인했습니다.”
아테르가 짧게 말했다.
“그런데 확인한 뒤에 돌아가면, 그건 확인한 걸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는 아주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문서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걸 현장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결국 제 쪽 언어로도 거짓이 됩니다.”
시온은 그 말을 듣고 패킷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씹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억울함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자기 체계 안에서 봤을 때 보고도 넘어가면 체계 자체가 거짓이 되는 종류의 문제를 만난 것이다.
그건 시온이 지워진 이름에서 냄새를 맡은 것과 입구는 완전히 달랐지만, 끝점은 묘하게 같았다.
시온이 낮게 말했다.
시온이 씹던 걸 삼켰다.
“결국 둘 다 귀찮은 건 맞네.”
아테르는 그 말에 별 반응 없이 패킷을 한 입 더 먹었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세른은 그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각하가 스스로 입을 열어 자기 이유를 말한 건, 세른이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명령이나 질문은 했어도, 왜 여기 있는지를 설명한 적은 없었다. 그건 이 좁은 배 안에서 무언가 한 겹 더 벗겨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린이 물 패킷을 열며 말했다.
“그럼 이제 한 가지만 더 확인하자.”
시온이 봤다.
“뭘.”
“도착하면 뭐부터 하는 건지.”
서린의 목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방향이 어긋나면, 이 배 안에서 겨우 맞춘 기능적 공조도 바로 다시 갈라질 수 있었다.
요나가 조종석에서 대답했다.
“접속점 도착하면 연결선이 대기 중이야.
거기서 성단 쪽 외곽선으로 갈아타는데, 그 선에 엘리아가 붙여준 사람이 있을 거야.”
“이름은?”
“아직 안 줘.”
서린이 혀를 찼다.
“끝까지 그러네.”
“이런 데선 그게 제일 안전해.”
요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름을 너무 빨리 알면, 잡혔을 때 팔 게 더 많아지니까.”
시온이 작게 웃었다.
“좋네. 오늘 두 번째로 나한테 팔 거 얘기하네.”
“좋은 건 아니지.”
“나도 알아.”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배 안의 공기는 아까보다 조금은 묽어져 있었다. 여전히 편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의 숨소리에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수준은 지나 있었다.
아테르가 창 없는 외벽을 한번 봤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건 오히려 나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가, 이상하게도 선택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 같았다. 돌아갈 수 있는 거리가 눈에 보이면 흔들리지만,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세른이 아주 낮게 말했다.
“접속점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요나가 짧게 답했다.
“두어 시간.”
시온이 등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
“그럼 좀 쉬자.
어차피 도착하면 또 뛸 거잖아.”
서린이 그 말에 처음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벽에 어깨를 기대고 눈을 반쯤 감았다. 진짜 자는 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는 습관이었다. 다만 머릿속에선 이미 다음 접속점에서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끊고 누가 물러서야 덜 망하는지만 정리하고 있었다.
아테르도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 카이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방금 자기가 한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확인한 뒤에 돌아가면, 그건 확인한 걸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 말은 시온에게 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한 말이었다.
세른만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건 항상 자기 몫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배는 어둠 속을 계속 달렸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돌아갈 곳은 이미 더 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