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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걸어 들어가는 값

# 33화. 걸어 들어가는 값 불시착 직후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지우가 엔진 패널을 뜯어보는 동안, 서린은 선체 안쪽 공기를 먼저 정리했고, 세른은 바깥 풍속과 열기 흐름을 읽었다. 아테르는 남은 승인 흔적이 어디까지 죽었는지 확인했고, 카엘은 조각을 한 번도 바닥에 내려놓지 않은 채 슬릿 바깥만 보고 있었다. 살아남았다고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어떤 값을 치르고 움직여야 하는지가 시작된 상태였다. 시온은 선체 벽에 기대 선 채 재킷 안쪽 종이를 다시 한 번 만졌다. `하즈란` `아카` 두 단어는 여전히 설명이 없었다. 대신 이제는 방향이 아니라 숙제처럼 느껴졌다. 이 행성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확실하고, 누구인지도, 무엇인지도, 왜 엘리아가 그 이름을 남겼는지도 아직 모르는 상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선명한 목표처럼 남았다. 이름 하나로는 부족한데, 버릴 수는 없는 종류의 선이었다. 한지우가 패널 안쪽으로 거의 상반신을 처박은 채 말했다. “좋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 죽겠네. 이건 진짜 예쁘게 망가졌다.” 서린이 바로 받았다. “살릴 수 있어, 없어.” 한지우가 한참 대꾸하지 않다가, 안쪽에서 툭 하고 뭔가를 떼어낸 뒤에야 몸을 뺐다. 손끝엔 검게 탄 응답선 조각이 들려 있었다. “살릴 순 있지.” 그가 말했다. “근데 그냥은 절대 못 떠. 축 하나가 죽기 직전까지 갔고, 보조 부양판 둘도 응답 밀려. 에테라이트 제대로 못 구하면, 얘는 여기서 관짝 된다.” 짧은 정적. 시온이 물었다. “얼마나 필요해.” “양보다 질.” 한지우가 즉답했다. “가짜 말고 진짜. 그리고 이 정도 상태면 잔가루로는 안 돼. 결 살아 있는 걸로 붙여야 해.” 아테르가 낮게 말했다. “판별할 수 있습니까.” 한지우가 코웃음 비슷하게 숨을 뱉었다. “내가 보면 대충 감은 오는데, 하즈란 같은 데선 속여 파는 놈이 더 많을 거다.” 세른이 조용히 덧붙였다. “즉 물건도 찾아야 하고, 속이지 않을 손도 찾아야 한다는 뜻이군요.” 시온은 그 말 끝에서 재킷 안쪽 종이를 더 뚜렷하게 느꼈다. 속이지 않을 손. 진짜와 가짜를 가를 수 있는 누군가. 엘리아가 남긴 이름 하나. 아카. 서린이 시온을 봤다. “겹치네.” 시온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카엘이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슬릿 바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에테라이트 파는 데가 따로 있어?” 한지우가 어깨를 한 번 폈다. “파는 데야 있겠지. 문제는 진짜가 거기 있냐는 거고.” 세른이 바깥 쪽 패널을 훑으며 말했다. “가장 가까운 열원 흔적은 북동쪽입니다. 큰 정착지는 아니지만, 이동 거래 흔적이 겹쳐 있습니다.” 아테르가 이어 말했다. “폐선체 군 바깥으로 난 자국도 있습니다. 자연 풍식이 아니라 반복 이동선에 가깝습니다.” “시장 냄새네.” 한지우가 말했다. 서린은 곧장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슬릿 바깥 모래와 골조 그림자를 잠깐 보다가 물었다. “추적선은.” 세른이 짧게 답했다. “열기층 통과 직후 시야는 끊겼습니다. 다만 완전히 잃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당연하지.” 서린이 낮게 말했다. “우린 살아서 떨어졌고, 저쪽은 그걸 봤어.” 카엘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쟤넨 바로 못 내려올 거다. 근데 흔적은 찾으려 하겠지.” 시온은 슬릿 바깥을 다시 봤다. 반쯤 파묻힌 폐선체 그림자들, 그 사이를 쓸고 지나가는 모래바람, 아직도 뜨거운 열이 남은 금속 껍데기. 하즈란은 도착지라기보다, 살아남은 것들을 더 오래 버티게도 하고 더 빨리 썩게도 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서린이 짧게 정리했다. “좋아. 그럼 움직인다.” “지금?” 한지우가 되물었다. “지금.” 서린이 잘랐다. “이 배 상태를 다 까 보고 앉아 있으면, 흔적만 더 진해져. 필요한 것만 챙기고 시장 먼저 찾는다.” 한지우는 불만을 삼키듯 혀를 찼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진 열도, 부서진 축도, 뜨거운 외벽도 식기 전에 손을 대고 싶겠지만, 그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한 물건을 구해야 한다는 걸. 아테르는 조용히 물었다. “배를 비워 둬도 괜찮겠습니까.” 이번엔 카엘이 먼저 말했다. “완전히는 안 돼.” 짧은 정적. 서린이 그를 봤다. 카엘은 조각을 안쪽으로 더 끌어안은 채 말했다. “여긴 버려진 데 같아 보여도, 버려진 것부터 먼저 뜯기는 곳이야.” 한지우가 작게 웃었다. “좋네. 나랑 같은 말 하네.” 시온은 그 짧은 대화 끝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다. 전부가 움직이면 배가 비고, 전부가 남으면 아무것도 못 찾는다. 누군가는 남아야 하고, 누군가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서린도 같은 결론에 닿은 듯 보였다. “나랑 시온이 간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시장부터 보고, 아카 흔적 찾고, 에테라이트 손도 같이 본다.” 한지우가 바로 말했다. “난 남는다.” 그건 예상 안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이 배 이대로 비우면 진짜 끝이야. 응답선 붙이고, 뜯긴 쪽 임시라도 막아둬야 해.” 세른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저도 남는 편이 낫습니다. 접근선 기억은 제가 맡고 있으니, 추적이 다시 잡히는지 계속 봐야 합니다.” 아테르는 시온보다 먼저 서린을 봤다. “저는 같이 가겠습니다.” 서린이 짧게 물었다. “이유.” “시장에 승인 잔향이 남아 있다면 제가 먼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손을 찾는다면, 질문 방향도 제가 더 정확할 겁니다.” 시온은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남는 건 카엘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카엘이 먼저 말했다. “난 안 남아.” 한지우가 눈썹을 올렸다. “배는 뜯겨도 되고?” “너 혼자 두면 더 잘 지키겠지.” 카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저기서 조각 냄새 나는 걸 찾는 건 내가 더 빠를 수도 있어.” 그 말은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시온도, 서린도, 아테르도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조각을 쫓아본 흔적이 있었다. 시장에서 정보값을 매기고 눈을 피하고 냄새를 좇는 쪽도, 여기선 분명 쓸모가 있을 수 있었다. 한지우가 작게 혀를 찼다. “좋네. 이제 남는 건 나랑 세른 둘이네.” “불만 있나.” 서린이 물었다. “아니.” 한지우가 툭 답했다. “대신 돌아올 때 손에 뭐라도 들고 와.” 시온은 재킷 안쪽 종이를 꺼내 한 번 더 펼쳤다. `하즈란`, `아카`. 모래바람이 약하게 안쪽까지 스며들며 종이 끝을 흔들었다. 카엘이 그걸 보다가 물었다. “그 이름, 사람 맞아?” 시온이 짧게 답했다. “아직 몰라.” 아테르가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카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 눈빛만 바뀌었다. 이름 하나에 조각 냄새가 붙을 때 사람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시온은 그 짧은 순간에서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린은 무기보다 먼저 물과 여과포, 이동용 태그 조각부터 챙겼다. 아테르는 쓸 수 있는 휴대 판독기와 남은 승인 기록편을 정리했다. 시온은 종이와 최소 장비만 안쪽으로 눌러 넣었다. 카엘은 여전히 조각을 몸 가까이에 붙인 채, 바깥으로 나가는 가장 짧은 선을 먼저 보고 있었다. 한지우가 선체 외벽 쪽 임시 패치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좋아. 다녀와. 난 이 시체 안 죽게 붙들고 있을 테니까.” 세른은 이미 슬릿 바깥으로 난 발자국 없는 쪽을 골라 보고 있었다. “북동쪽 이동선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열린 모래보다 골조 그림자를 타는 편이 낫습니다.”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림자 따라 간다.” 선체 문이 완전히 열리자, 하즈란의 열이 안쪽으로 훅 밀려들었다. 우주선 안에서 느끼던 열과는 전혀 달랐다. 기계열이 아니라, 행성 자체가 오래 데운 숨을 그대로 내뿜는 듯한 열. 모래와 타버린 금속, 오래된 기름, 말라붙은 바람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시온은 바깥으로 첫발을 디디며 아주 잠깐 멈췄다. 발아래 모래는 부드럽기보다 금속 가루가 섞인 재 같았다. 멀리선 반쯤 파묻힌 폐선체들이 마치 죽은 짐승 갈비뼈처럼 사막 위로 솟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 손이 반복해 드나든 흔적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즈란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게 버려진 채 남아 있어서, 사람까지도 오래 버려두지 않는 곳 같았다. 카엘이 먼저 한 걸음 내려섰다. “좋네.” 그가 낮게 말했다. “살아 있는 냄새가 난다.” 한지우가 선체 안쪽에서 바로 받아쳤다. “난 그 말이 하나도 안 좋다.” 서린은 대꾸하지 않고 앞을 봤다. “간다.” 그 한마디와 함께 넷은 폐선체 그림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배와, 그것을 붙들고 남는 둘이 있었다. 앞엔 에테라이트와, 이름 하나뿐인 아카와, 누가 먼저 값을 매기려 들지 모르는 시장이 있었다. 하즈란은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대신, 걸어 들어오는 쪽이 먼저 값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곳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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