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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같은 선실

# 8화. 같은 선실 외곽 유지교 아래로 빠져나온 뒤에도, 아무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 번 열린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등 뒤에선 아직도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누군가 길을 닫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고, 항구 위쪽 경계등은 하나둘 꺼지는 중이었다. 위는 제국이 닫고 있었고, 아래는 이미 돈 냄새 맡은 인간들이 번지고 있었다. 살아 나왔다고 끝난 게 아니라, 살아 나온 채로 더 깊은 쪽에 떨어진 기분에 가까웠다. 시온은 유지교 그늘 아래 잠시 멈춰 섰다. 숨을 고르려는 척이었지만, 사실은 셋이 어디까지 따라오는지 다시 보려는 거였다. 검은 외투의 승인원 인간과 그 그림자 같은 참모. 아직도 둘 다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고, 그래서 더 짜증났다. 서린도 그걸 읽은 얼굴이었다. “좋아. 안 놓치고 따라오네.” 세른이 그 말에 낮게 대꾸했다. “지금은 놓치면 더 위험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그렇긴 해.” 서린이 건조하게 받았다. 아테르는 주변을 한 번 더 훑었다. 유지교 아래는 오래된 보수 자재와 버려진 배관이 쌓여 있어 당장 몸을 숨기기엔 나쁘지 않았지만, 오래 머물 곳은 아니었다. 항구 바닥 인간들이 이 냄새를 맡기 시작하면, 이런 그늘은 오히려 먼저 뒤집히는 장소가 된다. “이동해야 합니다.” 시온이 바로 받았다.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빠르게 움직이죠.” “말 참 곱게 한다.” 서린이 작게 웃었다. “좋네. 이 와중에 둘이 말싸움은 또 맞네.” 세른은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각하가 평소보다 말을 아끼지 않는 건 이례적이었고, 반대로 저 동맹 외곽항로 관리국 실무자는 지나치게 쉽게 물었다. 둘 다 피곤하고,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둘 다 아직 상대를 같은 언어로 분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불편한 정적을 깬 건 멀리서 들려온 경적이었다. 짧고 끊기는, 민간 화물선 접속 신호.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저 소리 아는 것 같은데.” 시온도 바로 반응했다. “나도.” 둘의 눈이 거의 동시에 한쪽 어두운 접속교 끝을 향했다. 낡은 소형 화물선 하나가 반쯤 꺼진 등만 켠 채 유지교 아래 그림자에 붙고 있었다. 정식 승선도, 정식 정박도 아닌 방식이었다. 누가 봐도 오래된 편법이었다. 서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직 안 떠났네.” 아테르가 물었다. “아는 선입니까.” 시온은 잠깐 망설이다가 짧게 답했다. “모르는 선보단 낫지.” “그건 답이 아닙니다.” “이 도시에서 제일 쓸모 있는 답이지.” 화물선 측면 램프가 절반쯤 열리더니, 안쪽에서 마른 체격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거칠게 자른 머리, 빛보다 그림자에 익숙한 눈, 괜히 말 수가 적어 보이는 표정. 요나 헤일이었다. 그는 시온을 보자마자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또 너냐.” 시온이 피식 웃었다. “반가움 표현 참 따뜻하다.” “따뜻하게 반길 상황으로 안 보이는데.” 요나의 시선이 곧바로 시온 뒤쪽으로 넘어갔다. 서린, 검은 외투의 낯선 남자, 그리고 더 조용한 한 명. 그는 그 배치를 보고 바로 얼굴을 구겼다. “너 혼자 사고 친 게 아니네.” 서린이 대신 대답했다. “이번엔 좀 크게 물었어.” 요나는 잠깐 말이 없었다. 항구 밑바닥에서 오래 산 사람 특유의 계산이 눈 뒤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지금 이 넷을 태우면 귀찮아진다. 안 태우면 더 귀찮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시온이 저 얼굴로 온 날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거나, 아주 큰 거거나. 경험상 전자는 드물었다. 그는 결국 램프를 더 열었다. “타. 대신 설명은 안에서 해.” 아테르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 저런 배에, 저런 방식으로, 저런 인간의 허락 하나에 의지해 오르는 건 그가 익숙한 종류의 이동이 아니었다. 세른은 그 반응을 보고 작게 숨을 삼켰다. 각하가 지금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절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시온이 먼저 램프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좋아. 오늘 들은 말 중 제일 예쁘네.” 요나가 무표정하게 받아쳤다. “닫기 전에 타라는 뜻이야.” 배 안쪽 선실은 생각보다 더 좁았다. 사람 넷이 서 있으면 공기가 금방 차고, 누군가 한 명만 움직여도 다른 셋이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구조. 오래된 계기판 불빛이 희미하게 벽에 번졌고, 화물칸 쪽에서 기름과 건조 식량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기록 바깥의 사람과 물건을 잠깐 숨겨 다음 접속점으로 밀어 보내는 데 익숙한 배 특유의 공기였다. 요나는 문을 닫자마자 바로 물었다. “누가 쫓아오는데.” 시온이 짧게 대답했다. “많아.” “설명 성의 없네.” “성의 있게 말하면 더 길어져.” 요나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맞춰볼까. 동맹 외곽항로 관리국이냐, 항구 바닥이냐, 아니면 둘 다냐.” 서린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둘 다보다 조금 더 많아.” 요나의 시선이 다시 아테르 쪽으로 갔다. 단정한 외투, 정리된 자세, 그런데 지금 이 배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인간. 요나는 속으로 빠르게 결론 내렸다. 저건 동맹 외곽항로 관리국도 아니고 바닥도 아니다. 더 귀찮은 쪽이다. “저건 뭐야.” 질문은 시온에게 갔지만, 대답은 아테르가 직접했다. “이동에 필요한 불청객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요나는 그 말에 잠깐 웃었다. “말 참 곱게 하네.” 시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 말이지.” “아니, 저쪽 말.” 서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서린이 낮게 킥킥거렸다. 둘 다 재수 없는데 결이 다르다니. 세른은 그 짧은 티키타카 사이에서도 선실 문, 선체 진동, 바깥 접근 신호를 계속 읽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아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판단입니다.” 시온은 벽에 등을 기대며 넷을 한 번 둘러봤다. 이 조합이 우스웠다. 동맹 외곽항로 관리국 말단, 그 말단 붙잡고 사는 독설가, 제국 승인원 인간, 그리고 그보다 더 조용한 그림자. 누구 하나 제대로 믿을 수 없는데, 방금은 서로 없었으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불편한 사실을 제일 먼저 입 밖에 낸 건 의외로 아테르였다. “방금은… 당신들 없이는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시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정직해서 오히려 더 거슬렸다. 몇 박자 뒤, 그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은 말 하긴 싫은데, 그쪽 승인선 없었으면 우리도 끝이었겠지.” 서린이 작게 혀를 찼다. “좋아. 보기 드문 역사적 화해네.” 세른이 무심한 얼굴로 받았다. “화해까진 아닙니다.” “응. 그건 나도 보여.” 짧은 정적. 요나는 선실 벽에 기대어 그 넷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뭘 태운 건지는 아직 다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았다. 이 사람들은 같이 온 게 아니었다. 같은 문제를 들고 같이 쫓겨온 사람들이었다. 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아테르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해석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까.” “숨길 수도 있고.” 시온이 덧붙였다. “값도 알고, 헐값에 안 넘길 사람.”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진 걸 들고 공식 라인으로 들어가면 바로 묻혀. 항구 바닥에 넘기면 찢겨서 팔리고.” 세른이 조용히 물었다. “후보가 있습니까.” 시온은 잠깐 답을 고르지 않았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 이름을 여기서 꺼내는 순간, 이 넷이 단순 탈출이 아니라 더 깊은 도피로 들어간다는 뜻이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길도 없었다. “있어.” 요나가 시온 얼굴을 보더니 바로 중얼거렸다. “아. 그 표정 보니까 나도 이름 알겠다.” 서린이 작게 웃었다. “나도.” 아테르가 낮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시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엘리아 베른.” 그 이름이 나오자 선실 안 공기가 또 한 번 얇게 바뀌었다. 세른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말하는 셋의 반응만으로도 그 이름이 단순한 개인 이름이 아니라는 건 읽었다. 아테르는 더 직접적으로 느꼈다. 그 이름은 제국 승인원 정식 기록 안쪽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살아남는 다른 종류의 질서에 가까웠다. “믿을 수 있는 인물입니까.” 아테르의 질문에 시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답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더 정확했다. “그럼 왜 갑니까.” 이번엔 서린이 답했다. “믿어서 가는 게 아니야. 지금 가진 조각을 읽고, 숨기고, 값까지 아는 쪽이 걔밖에 없으니까 가는 거지.” 서린은 아주 짧게 덧붙였다. “문장만 읽는 게 아니라, 어디가 잘려 나갔는지의 버릇까지 읽는 쪽이 필요해.” 요나가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름까지 나왔으면 나도 이제 발 빼긴 늦었네.” 시온이 피식 웃었다. “원래 넌 늦게 깨달아.” “입 닥쳐. 연료값 받을 거야.” 세른은 짧게 시온과 서린, 그리고 요나까지 한 번에 훑었다. 이건 제국 바깥의 회색망이었다. 정식 문서엔 남지 않지만, 지워진 것들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곳. 그리고 각하는 지금 그 세계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아테르는 좁은 선실 천장을 잠깐 올려다봤다가, 다시 시온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 가면, 더 읽을 수 있습니까.” 시온은 품 안쪽 조각을 한 번 눌러 잡았다. “읽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대신 그 순간부터 진짜로 못 돌아가.” 누구도 그 말에 가볍게 대답하지 못했다. 바깥 선체가 한 번 크게 떨리더니, 요나의 화물선이 외곽 유지교 아래 그림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립 항구도시의 불빛은 멀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당장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는 벗어나는 중이었다. 서린이 마지막으로 짧게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누가 먼저 설명할래?” 그 말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엉겨 붙은 네 사람의 첫 선실이 드디어 진짜 대화의 자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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