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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마지막 항구로 가는 길

# 9화. 마지막 항구로 가는 길 요나의 화물선은 빠르지 않았다. 대신 사라지는 데 익숙한 배였다. 정식 항로를 곧게 타지 않고, 외곽 유지교 그림자와 폐선체 사이를 비집고 돌았다. 멀리서 보면 방향을 잃은 고물선 같았고, 가까이서도 딱히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 항구에선 눈에 띄는 배보다, 대충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배가 더 멀리 갔다. 선실 안 불빛은 끝까지 밝아지지 않았다. 요나는 계기판 몇 개만 최소한으로 켜둔 채 조종석과 화물칸 사이를 짧게 오갔다. 필요 이상으로 묻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심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선이 이 바닥에선 제일 비싼 배려였다. 시온은 그런 요나의 방식에 익숙했다. 말이 적은 게 무심한 게 아니라, 쓸데없는 걸 묻지 않는 쪽의 예의라는 것도. 반면 아테르는 아직 그 구분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선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지만, 몸 어디도 완전히 이 배에 맡기진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좁고 낡은 공간, 최소한의 조명, 문서가 아니라 사람 얼굴과 눈치로 굴러가는 이동. 발카르 가문 후계자와 제국 승인원 인간이 평소 앉아 있을 자리는 분명 아니었다. 서린은 그걸 보고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시온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안 죽겠네.” “누가.” “저쪽.”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시온은 힐끗 아테르 쪽을 봤다. 검은 외투는 이미 먼지와 금속 가루가 묻어 처음보다 덜 정돈돼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더 낯설게 보였다. 이런 자리에 와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은 보통 두 종류였다. 진짜 멍청하거나, 진짜 오래 버틴 사람이거나. “저 사람은 원래 저런가 보지.” “아니.” 서린이 낮게 웃었다. “원래 저런 사람은 이런 배에 타기 전에 한 번쯤 더 티 내.” 시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묘하게 맞아서였다. 반대편에서 세른은 조용히 선실 문 틈과 계기판 반사광, 바깥 접속 신호를 계속 읽고 있었다. 이동 중에도 한 번도 완전히 긴장을 놓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불편하기보다 익숙해 보였다. 마치 저 사람도 자기가 편히 앉아 있을 자리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처럼. 요나가 조종석 쪽에서 물었다. “뒤는 아직 안 붙었어. 근데 목적지 바꾸려면 지금 말해.”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안 바꿔.” “그럴 줄 알았지.” “갈 데도 없잖아.” 요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갈 데 없는 사람들만 모이면 보통 배가 가라앉거나, 반대로 이상하게 오래 떠 있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짧은 정적 뒤, 아테르가 처음으로 먼저 물었다. “그 엘리아 베른이라는 인물은, 당신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까.” 질문은 시온에게 향했지만, 선실 안 모두가 들었다. 시온은 대답하기 전 잠깐 조각이 든 안주머니를 눌렀다. “오래 봤지.” “신뢰합니까.” “아니.” 아테르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아까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같은 질문이잖아.” 서린이 그 사이를 잘라 먹듯 끼어들었다. “믿는 사람이라서 가는 게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라서 가는 거라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세른이 조용히 물었다. “필요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뭡니까.” 이번엔 시온이 바로 답하지 않고, 서린 쪽을 한 번 봤다. 서린이 턱으로 계속 말하라는 듯 아주 짧게 움직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건 조각이야. 반쯤 타고, 반쯤 잘리고, 이름도 순서도 다 끊긴 조각.” 그는 시체 자리에서 주운 기록판 조각이 아니라, 사건 전체를 말하고 있었다. “그걸 읽으려면, 뭐가 남았는지보다 뭐가 비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시온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조각은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어도, 답은 조각만으로 안 나와. 그게 잘려 나온 자리까지 가서 봐야 비로소 이어져.” 아테르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그건 흥미라기보단, 자기 언어 바깥의 사고방식을 처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표정에 가까웠다. 시온은 계속 말했다. “숨길 수도 있어야 하고. 어디까지 위험한지도 알아야 하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이걸 처음 본 척 안 할 사람이면 더 좋지.” 요나가 그 말에 작게 코웃음쳤다. “좋네. 결국 너희가 찾는 건 사람이라기보다 마지막 항구네.” 아테르가 그 표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항구.” 요나가 짧게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히 버리긴 아까운데, 들고 있자니 목숨이 먼저 아까운 것들 있잖아. 사람도 그렇고, 기록도 그렇고.” 서린이 낮게 덧붙였다. “엘리아 있는 데가 딱 그래.” 그 한마디 뒤로 선실 안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지금까지 엘리아는 이름으로만 있었는데, 처음으로 장소감이 붙었다. 버려진 것과 지워진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걸리는 곳. 아테르는 아주 잠깐 시선을 내렸다. 제국 승인원 바깥에도 질서가 있다. 그것도 제국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닌 질서가. 그 사실 자체는 머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질서에 직접 기대야 하는 순간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곳이 안전합니까.” 이번엔 요나가 먼저 웃었다. “안전한 곳이면 너희가 왜 거길 가.” 시온도 피식 웃었다. “저건 맞는 말이네.” 세른은 아무 말 없이 그 짧은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시온 쪽 인간들은 확실히 기준이 달랐다. 제국처럼 안전을 전제로 문을 고르는 게 아니라, 위험한 곳들 중 어디가 덜 배신적인지를 고르는 방식. 낯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요나가 속도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곧 들어간다. 다들 얼굴 좀 치워. 엘리아 쪽 골목은 사람 얼굴보다 표정부터 먼저 읽는 동네야.” 서린이 바로 시온 쪽을 보고 웃었다. “듣지? 너 표정부터 치우래.” “내 표정이 왜.” “물린 개 같거든.” “좋아. 오늘도 표현 참 예쁘다.” 짧은 웃음이 지나간 뒤, 선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깥 창 너머로 중립 항구도시의 다른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밝은 도크와 시끄러운 환승층이 아니라, 더 안쪽의 오래된 보관구역. 낡은 창고들이 겹겹이 붙어 있고, 쓰다 버린 간판 위에 새 간판이 덧댄 골목. 창문 안쪽엔 불빛이 있어도 바깥으론 거의 새지 않았고, 문들은 다 닫혀 있는데 누가 안에 있는지는 다 아는 종류의 구역. 요나가 낮게 말했다. “다 왔다.” 화물선이 거의 소리도 없이 한쪽 어두운 접속 틈에 붙었다. 정식 정박장이 아니라, 아는 사람만 아는 뒤쪽 적재구. 발판이 내려오기도 전에 시온은 이미 바깥 공기를 읽고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 먼지, 눅눅한 목재, 향신료, 금속 잠금장치, 그리고 끝까지 버려지지 않은 것들이 오래 머무는 장소 특유의 냄새. 서린도 그걸 느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좋네. 진짜 마지막 항구네.” 아테르는 램프 앞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다. 허술해 보였다. 적어도 처음엔. 질서가 아니라 틈새에 기대어 유지되는 장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허술함 안에 나름의 선이 있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안으로 들이고, 무엇을 밖에 세워두는지. 제국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데, 그렇다고 무질서라고 부르기엔 너무 정확한 종류의 기준이었다. 세른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아테르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는 제국 승인원의 언어로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국 기록 바깥에 있는 어떤 문을 스스로 두드리러 온 셈이었다. 그는 결국 아주 낮게 말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온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옆얼굴만 봤다. 그 말엔 아직 동의도 신뢰도 없었지만, 적어도 돌아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요나가 먼저 램프를 완전히 내렸다. “좋아. 그럼 가. 대신 오늘은 내가 여기 있었다는 말 하지 마.” “우리가 언제 그랬냐.” “늘 안 한 척하다가 나중에 내 이름 튀어나오더라.” 서린이 웃었다. “그건 맞아.” 넷은 차례로 램프를 내렸다. 골목은 생각보다 더 좁았고, 조용했다. 멀리서 항구 소음이 죽은 것처럼 깔려 있었지만, 이 근처에선 발소리 하나도 괜히 크게 들렸다. 닫힌 문들 사이로 시선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다 보고 있는 종류의 거리였다. 시온이 앞장섰다. 한 번, 두 번, 꺾인 골목을 지나 낡은 보관동 앞에 멈췄다. 문 위 간판은 오래전에 바래 글자 절반이 죽어 있었고, 그 위로 더 최근에 덧댄 표식이 비뚤게 매달려 있었다. 공식 저장소도, 완전한 사설 창고도 아닌 애매한 얼굴이었다. 아테르는 그 문을 보며 아주 잠깐 생각했다. 이런 곳에 정말 사건의 다음 답이 있을까. 그런데 시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서린도 마찬가지였다. 요나는 이미 뒤로 빠져 있었고, 세른은 문보다 주변 시야를 먼저 읽고 있었다. 시온이 문 앞에 서서 아주 짧게 두 번, 숨 돌릴 틈을 주고 한 번 더 두드렸다. 안쪽이 조용했다. 그리고 조금 뒤, 안에서 금속 잠금 하나가 아주 느리게 풀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도 더 말하지 않았다.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안주머니를 눌렀고, 아테르는 처음으로 이 문이 열리면 자기 세계 바깥의 언어를 정말 들어야 한다는 걸 또렷하게 느꼈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네 사람은, 지워진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장소의 문턱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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